소똥구리(4)

by 돌돌이

밥을 먹고 화장실을 갔다가 내가 누운 직후부터 녀석은 나에게 다가온다. 녀석은 페어플레이 정신에 입각해서 날 밀어내고 있었다. 내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고 현재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중요치 않아 보인다. 녀석은 자신의 기준을 확고히 하고 있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명확히 알고 있다. 손가락 두 마디만 한 녀석은 하루 종일 날 밀다가 저녁이 되면 퇴근을 한다. 말 그대로 자신이 하던 일을 멈추고 녀석을 처음 발견했던 그 한구석으로 가서 배를 뒤집고 눕는 것이다. 녀석의 배를 본 것은 나를 하루 종일 밀고 난 그날부터였다. 힘든 일을 마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듯이 몸을 뒤집은 채로 꼼짝하지 않았다. 처음 녀석이 힘들어서 죽었을 거란 생각도 했었지만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 나를 향해 돌진하는 것을 보고 안심했다. 똥이 되어버린 나에게, 녀석은 동일한 시간에 찾아와서 새로운 방법으로 밀었다. 앞발로도 밀다가 뒷발로, 머리로 밀기도 하고 옆으로도 밀었다. 녀석이 깨문 적도 있었는데 내가 소리를 내자 녀석은 물던 행동을 멈추고 기존해 하던 밀기를 시도했다. 아파서 소리를 냈다기보단 새로운 자극에 반응을 한 것이다. 녀석은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움이라도 느끼듯이 앞발로 자신의 머리를 문대며 다시는 물지 않고 밀기 시작했다.


밥과 김치로 연연하고 하루 20시간 이상을 정자세로 누워있으면 없던 병도 생길 것 같지만 10대의 몸은 생각보다 약하지 않았기에 흔한 욕창도 없다. 의식이 있고 미세한 움직임은 가능했기 때문에 피가 쏠리거나 눌림이 심해지면 알아서 몸을 비튼다. 처음 이곳에 와서는 의도적으로 내 몸을 통제하고자 했다. 화장실을 가는 것도 최소한으로 하고 식사량도 지금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사람은 밥 반 공기만 먹어도 생존이 가능하다는 것과, 생리현상은 수의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것도 그때 깨달았다. 최소한의 움직임과 최소한의 식사로 내 의지를 보인 것이다. 이것이 과연 자유의지가 발현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렇게 하고 나서야 내가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남들은 트라우마 때문에 악몽에 시달린다고 하지만, 따로 살면서부터 아버지가 생각 나진 않는다. 술에 절고 땀에 절어있는 그 냄새는 어렴풋이 생각나기도 한다. 나에게 돌아오는 발길질은 술과 땀으로 만들어졌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간간이 아버지가 이야기 한 '피가 섞이지 않은 호래자식'이라는 표현을 떠올려 볼 때 난 그의 핏줄은 아니었나 보다. 태어나는 것은 내 의지가 아니다. 얼굴이 새까만 그의 얼굴과 하얀 내 얼굴은 확연히 차이가 있었다.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의 얼굴이 생각 나진 않는다. 화장실의 거울에서도 난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내 정신은 녀석의 앞발과, 몸통의 차갑고 딱딱한 촉감에 의지한 채로 녀석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녀석이 날 민지 일주일이 됐을 무렵, 녀석은 나를 향해 돌진하지 않았다. 그 시간에 오지 않는 녀석에게 왜 오지 않냐며 먼저 묻고 싶었지만 그것은 우리 사이에 암묵적인 룰을 위반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묻지 않았고, 서로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왼쪽 허벅지엔 사라지지 않는 멍 자국이 있다는 것을 녀석은 모를 것이다. 매번 오른쪽 허벅지와 종아리를 눌러 왔기 때문에 왼 다리를 본 적이 없을 거다. 왼쪽 다리는 미리 비가 올 것을 알려준다. 시려오는 통증이 있어도 천장을 바라보는 앙와위 자세를 바꾸지 않는다. 통증이 있다는 것은 내가 생존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유일한 장치다. 왼쪽 다리를 녀석이 알고 공략을 했더라면 녀석과의 승부가 더 쉽게 끝났을 수도 있다. 사실 자세를 바꾸고 통증에 대한 호소를 하면 그 통증의 강도가 더 거세진다. 통증의 사이클을 짧게 하려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시간이 흐르길 기다려야 한다. 이런 내 약점과 행동들을 보고도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녀석은 크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배를 까고 눕고, 일정 시간이 되면 다시 제자리를 돌아가는 것도 녀석이 선택한 일이다. 왜 첫 6일간은 한 번도 배를 까고 눕지 않았을까? 자신이 내 몸을 밀었던 순간을 기점으로 녀석의 태도는 확연히 바뀌었다. 나도 녀석이 하는 행동과 패턴에 대해 묻지 않았고 오롯이 지켜봤을 뿐이다.


자신이 보고 들은 것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녀석에게 내가 하는 말은 중요치 않았다. 녀석은 나를 그윽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녀석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심연은 녀석이 나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곳은 밤낮의 변화가 거의 없다. 창이 없는 방이 어떻게 존재하냐고 물을 수 있지만, 200에 20은 그것이 가능하게 만든다. 밤이 되면 난 녀석을 보지 않는다. 하루 내내 녀석을 들여다보고 배고픔을 느끼며 내 자유의지를 생각하다 보면 오히려 밤은 반갑기까지 했다. 나에게 잠을 자고 일어난다는 개념은 모호했다. 사실 아침이라고 명명하고 밥을 먹는 시점도 그냥 한순간에 고정되었을 뿐이지 그 차이가 없었다. 저녁 7시인지 아침 7시인지 화장실 문을 열지 않고선 알 수 없었기에, 화장실의 문을 열어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깨어있는 순간과 자고 있는 순간의 차이를 분간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녀석의 등장은 내가 잠을 자고 일어났다는 확실한 결론에 도달하게 만들었다. 내가 완전하게 무의식 속으로 빨려 들어가서 내가 나 자신을 컨트롤할 수 없는 시간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한 잠에 빠져 있는 시간도 놀라웠지만 녀석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너무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잠을 깨는 이유는 피로가 풀려서 이기도 하지만 녀석을 보기 위해서였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녀석의 발길질과 박치기를 보며 보내고 있지만 밤에 정말 배를 뒤집은 채로 그대로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아무리 녀석이라고 해도 일주일이 넘도록 물도 먹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어디를 갔다 오고, 무엇을 먹고, 어떻게 휴식을 취하며, 똥은 싸고 있는지 알고 싶다. 녀석이 낮 동안 해왔던 그 노력과 일을 뻔히 알고 있는데 밤까지 녀석을 보고 있으면 다음날의 작전을 염탐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머뭇거리게 된다.


녀석이 나에게 몸을 뒤집은 모습을 보여준 순간부터 녀석은 장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내가 녀석을 공격할 순 없다. 녀석에게 나는 단순한 똥이자 먹이이고 알을 부화시킬 장소였을 것이다. 100그램도 안 나갈 것 같은 녀석은, 자신의 온몸을 사용하여 나라는 존재를 밀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도전이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난 벌써 녀석의 페이스에 말려들었다. 녀석의 행동 하나하나에 모든 의미를 부여하며, 녀석이 압력을 주며 미는 곳에 나도 모르게 힘을 주고 있다. 녀석은 내가 하는 반응을 온몸으로 느껴가며 작전을 수시로 바꾸고 있다. 나라는 똥 덩어리가 자신을 의식하는 것을 넘어서서 완전히 의존하고 있다는 것까지도. 그러니 배를 뒤집고 누운 채, 내가 하는 행동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다음날을 생각하며 잠들었다. 녀석에게 이름을 지어주기로 했다. 분류명이 아니라 티브이와 과학 도감에서 적혀있는 명칭이 아닌 말 그대로 이름을 짓기로 했다. 녀석에게 이름을 지어준다고 해서 녀석과 동등한 관계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녀석이 이름을 가지게 된 순간부터 녀석은 단순한 쇠똥구리라는 벌레의 범주를 벗어나게 된다. 10만 원이 들어있는 봉투들보다도 더 가치가 있는 것이다. 봉투는 이름이 없다. 돈이라는 물건이 들어있을 뿐, 내가 이름을 새기지 않았다. 이름을 주고 명명한다는 행위에서 녀석에게 의지하겠다고 다짐하는 꼴이었다. 날 몰아내기 위해 매일 투쟁하는 녀석에게 이름을 주고 의지를 한다니. 녀석은 내가 약해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을 의식하지 않고 천장을 보며 누워있는 내가, 자신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허벅다리에 힘을 줘가며 그와 힘겨루기를 하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소똥구리(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