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똥구리(3)

by 돌돌이

녀석의 정확한 이름은 모른다. 정확히 이야기해서 녀석의 생물학적인 분류에 따른 명칭을 모른다는 게 맞다. 하지만 대부분 녀석을 쇠똥구리라고 생각한다. 소똥구린지 쇠똥구린지 잘 모르겠지만 그게 녀석의 생물학적 분류가 맞는다면 날 똥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세상에 분명한 것과 당연한 것은 없지만 쇠똥구리가 나를 똥으로 판단하기까지 일주일이 걸린 것은 자명한 사실이고 녀석이 나를 굴리려고 애쓰고 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나는 매일 아침 7시에 식사를 한다. 밥을 먹고 반찬으로는 김치만 먹는다. 하루에 한 끼지만 남은 시간을 누워서 보내기에 배고픔을 느끼진 않는다. 지난 2년 동안 내가 배고픔을 느낀 적은 없었다. 아침에 할애하는 30분의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은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는데 쓰고 있다. 식사를 하다가 녀석의 움직임을 힐끗 쳐다본 적이 있다. 녀석은 내 시선에 딱히 반응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앞발과 뒷발을 쳐다보며 연장으로서의 쓰임이 충분한지 준비하고 있었다. 목수가 자신의 망치와 정을 쳐다보듯이, 미장이가 자기 허리에 꽂혀있는 흙손을 매만지듯이 자신의 앞발과 뒷발의 견고함을 스스로에게 인식시키고 있는 것이다. 녀석이 등장하면서 내 삶의 패턴은 변했다. 천장을 보는 시간 보다 녀석을 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느끼지 못했던 배고픔을 느끼게 된 것도 녀석이 내 다리를 밀기 시작한 다음날부터다. 무언가를 주의 깊게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배고픔을 느낄 수 있다는 걸 배웠다.


내가 배고픔을 느끼는 순간은 아버지란 인간의 발길질이 끝나고 난 뒤였다. 쓰나미같이 몰려오는 폭력의 시간은 길어봐야 30분이다.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배고픔이라는 무자비한 시간이 찾아온다. 아버지란 인간이 밥을 주지 않는 이상 난 그 고통의 시간을 무한히 느껴야 한다. 동사무소에서 영양제를 주고 갔었나 보다. 아버지란 인간은 그걸 던져두고 자리를 비웠다. 공복에 영양제를 먹고 나서 30분 동안 구역감에 시달리다가 위액과 함께 뱉어내고야 말았다. 나를 위해선지 아니면 그들의 생각과 판단으로 영양제를 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위액까지 게워내고 쓰러지고 나서야 이것은 공복으로 먹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깨달았다. 토를 하는 와중에도 이것을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을 내 몸은 인지하고 있었나 보다. 영양제를 한 알씩 먹었고 배고픔에 못 이겨 이것을 30알을 한 번에 복용한 적이 있다. 하루에 한 알을 먹고 있었던 이유는 배가 고파서 아껴먹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여러 알을 먹으면 난 그대로 쓰러져 죽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그날따라 아버지의 발길질이 거셌기 때문에 허기짐이 더욱 커선지는 알 순 없지만 30알을 그대로 삼켰다. 덕분에 난 병원에 갈수 있었다. 내가 죽으면 아버지란 인간의 삶은 완전히 끝장날 것이기에 병원으로 데려갔던 것일까? 내 몸에 있는 멍자국이 발견되고 나서 아버지는 사라졌다. 감옥에 갔을 거라고 추측은 했지만 그 이후에 나를 찾아온 적은 없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표현은 영국을 대변하는 용어였다. 이런 이상한 캐치프레이즈가 유행처럼 우리나라와 개발도상국으로 파고들면서 국가는 나를 물고 늘어지고 있었다. 난 한순간에 스타가 됐으며, 기자들과 구청장과 이름 모를 단체의 장들이 나와 사진을 찍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3일동안, 그들에겐 나는 쓰임이 있는 존재였고 내가 죽었거나 발견되지 않았다면 가치가 없었을 것이다. 뒤늦게 발견되었더라 하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사진을 찍고 이용하기 위해 줄을 섰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얼핏 지나가는 이야기로는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태였단다. 그들이 생각한 생존의 필수 조건인 영양제는 폭력과 배고픔에 지친 13살의 소년이 먹기엔 독이 되는 그런 것이었다. 내가 생명을 연장하고 활기찬 삶을 사는 것을 내 몸이 원치 않았던 걸까? 그냥 발길질이 끝난 후에 다가올 배고픔을 맞이하기 위해 약을 먹었다. 내 자유의지는 이렇게 처음 사용한 것이다. 삶 속에서 자유의지란 녀석은 죽음을 담보로 해야만 움직이는 것이었다.


소똥구리인지 쇠똥구리인지 아무튼 녀석이 일주일간 판단한 나는, 똥이다. 그래서 날 굴려서 먹이로 삼고 알을 낳을 공간으로 생각하고 있다. 소똥구리는 내가 알기로는 우리나라에서 멸종된 걸로 알고 있다. 살면서 실제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과학 다큐멘터리와 과학 도감이라는 책에서 본 것이 전부지만 사람의 인지능력은 신기하게도 대상에 대한 확신을 준다. 그게 맞고 틀리는 것은 중요치 않다. 내 머릿속에서 녀석은 소똥구리로 판명이 났다. 이유는 간단하다. 녀석이 나를 굴리려고 앞발을 내 허벅지에 가져다 밀기 시작한 순간부터 이런 확신이 든 것이다. 녀석이 날 똥으로 보고 있다는 점도 맞고 내가 똥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똥이라도 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녀석의 먹이가 되고 알을 낳을 공간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을 녀석이 한 거니까. 과연 그게 전부일까? 정말 녀석은 나를 밀어낼 수 있다고 생각해서 한건 아니었을까? 나처럼 무기력하게 아침 7시에 밥을 퍼서 먹고 물을 먹고 화장실을 가고 일상의 패턴이 획일화되어있는 녀석쯤은 자신의 굳건한 앞발로 밀어 버릴 수 있다고 계산이 선거겠지.


녀석이 날 파악하는 동안 내가 보여준 일상의 행태 중에,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보일 것들은 전혀 없었다. 녀석이 조금씩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며 내 이불을 들어왔을 때까지 난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녀석이 싸우는 것은 내가 아니라 화장실에 있는 바퀴벌레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먹을 게 없는 만큼 바퀴벌레들도 이곳 화장실을 은신처로 사용하지 숙식처로 사용하진 않는다. 화장실을 들어갈 때마다 한 마리 이상은 보이던 바퀴벌레들은 녀석이 내방에 나타난 지 3일을 기점으로 사라졌다. 이불에 올라오고 난 날부터 녀석들은 보이지 않은 것이다. 바퀴벌레들의 움직임은 귀에 거슬리진 않지만 충분히 인지할 수 있다. 우리는 서로 불가침조약을 맺고 지내고 있기 때문에 불편함을 주지 않는 선에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녀석이 이불에 올라오고 난 그날 밤, 바퀴벌레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녀석은 공존을 허락지 않았다. 자신이라는 존재가 3일에 걸쳐서 바퀴벌레를 몰아냈으며 그에 대한 합당한 대가로 이불로 진입한 것이었다.


침대에 있는 나는 그냥 똥덩어리일 뿐이었다. 엄청나게 크고 무겁지만 녀석이 밀수 있다고 생각한 상대. 바퀴 벌레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 난 밤에도 화장실을 들락날락 거렸다. 저녁에 물을 마시지 않는 이유는 밤에 화장실을 가지 않기 위함이었는데 이제는 한밤중에도 물을 마시고 화장실을 간다. 그간 참아왔던 욕구를 녀석이 나타나면서 풀 수 있게 되었다. 녀석은 밤중에는 날 공격하지 않는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날짜를 세진 않지만 하루의 일과를 수행하기 위해 내 몸은 시간에 대한 예민함을 갖추고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오는 복지사의 목소리로 날짜를 짐작할 수 있고 들어오는 지원 물품의 변화로 추석과 설날이 다가옴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알람시계가 없더라도 난 제시간에 일어나서 동일한 식사를 하고 동일한 시간에 화장실을 이용해 왔었다. 녀석의 등장은 화장실에 대한 자유를 나에게 주었으며, 이로 인해 시간에 대한 내 감각을 무뎌지게 만들었다. 나도 모르게 늦잠을 자고 밥을 늦게 먹었으며 기존에 먹던 양보다 더 먹기도 했고 화장실에 더 오래 여러 번 갔다 왔다. 녀석은 내가 오기까지 기다려 주었다. 내가 늦게 자더라도 보채지 않았고 기존과 같이 준비가 된 순간부터 다시 밀기 시작했다. 내가 모를 녀석만의 기준으로 행동을 추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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