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간 이곳에서 거주하면서 내 몸을 접촉 한 생명체는 녀석이 처음이다. 녀석이 이곳에 나타났을 때 내 표정엔 분명 변화가 있었다. 시간은 지난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다. 생채기 아래는 깊숙이 곪아있었고 그 겉면에만 딱지가 앉아 그럴듯해 보이는 것이다. 그래도 딱지 덕분에 의도적으로 못 본 척 넘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녀석이 왜 여기에 있는지, 본인 스스로가 선택해서 이곳에 왔는지는 알 길이 없다. 3일을 버틴 거미과에 속했던 녀석과 비교해 볼 때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을 버틸지 의문이었다. 우선 동물은 식과 주가 해결되어야 한다. 생존을 위해서 먹어야 하고 안전한 공간에서 잠을 자고 휴식을 취해야 한다. 이곳은 주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어도 식의 문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 녀석이 밥을 먹고 김치의 맛을 깨우친다면 기꺼이 내 몫을 떼어줄 수 있다. 내가 알기로는 근 30년 이래로 대한민국에 녀석이 출몰했던 기록은 없다. 화학비료를 먹지 않고 자란 소와 말들이 사라진 만큼 녀석들의 생존 지역 또한 사라져 버렸다. 가축들이 먹는 항생제에 절여진 비료와 사료들은, 그 부산물을 이용해 살아야 하는 녀석들에겐 치명적이었다. 100만 원의 현상금이 걸려있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녀석이 바로 내 눈앞에 있는 것이다. 현상금이 걸리고 나서도 몇 년간 발견이 되지 않았기에 그 몸값은 나보다도 높을 거다.
내 생각과는 달리 녀석은 첫날 24시간을 온전히 주변을 파악하는데 힘썼다. 무리하게 움직이지 않고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적의 존재와 주변 환경을 파악해가며 한 발자국씩 자신의 영역을 넓혀 왔다. 내가 누워있는 이불 위로 오기까지 3일이 걸렸는데 나라는 존재는 녀석에게 적으로 간주되진 않나 보다. 극도의 무기력함을 기반으로 한, 내 행동 패턴을 파악하기까지 녀석은 3일의 시간을 투자했다. 이불에 올라오면서부터 나를 기만해도 된다는 판단이 섰던 것일까? 나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하루를 유지하다 보니 자유의지가 있는 생명체라기보단 녀석처럼 생존만을 위한 생명체라고 명명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정말 생존의지로 똘똘 뭉친 녀석의 행동은 더 다채롭고 역동적이었다. 이불까지 거리는 기껏해야 10cm. 하루에 3cm를 움직인다 쳐도 한 시간에 평균 0.1cm를 움직이는 것이다. 한 시간에 0.1cm를 움직이기 위해 녀석은 몇 번씩 고개를 들썩이며 전후방을 감시하고 있다. 밤에는 녀석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는다.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으로 봐서 밤에는 잠을 자고 있다고 생각한다. 누워 있으면서 청각과 촉각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 때 제대로 맞은 왼쪽 눈의 시력은 좋지 않다. 덕분에 국가에서 인증한 라이선스인 장애등급을 받을 수 있었다. 원근감이 없어진 만큼 다른 감각들이 대신 그 빈 곳을 채우고 있다. 거리감은 소리에 의존하며, 계절의 변화는 피부가 먼저 알아차릴 수 있다.
아주 미세한 소리라도 이 원룸에선 크게 들을 수 있다. 이 반지하 원룸은 창문의 존재를 허락지 않아서 흡사 동굴 같은 효과를 준다. 이불에서 일어나서, 화장실 문을 열 때 나는 삐걱거림은 방안에 퍼져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곳에서 녀석의 일거수일투족은 나에게 감시되고 있다. 징그러운 세상은 나를 감시하기 위해 전화도 하고 편지도 쓰고 사람도 보내지만, 난 온전히 내 감각만으로 녀석을 감시하고 있다. 녀석은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대상은 알 수 없지만 무언가를 경계하면서 자신의 움직임에 허락을 받는다는 듯이, 한발씩 내디디며 자신의 공간을 늘려 나간다.
이불 위에 올라오고 나서부터 내 허벅지에 녀석의 다리가 닿기까지 다시 3일의 시간이 필요했다. 내 삶엔 성급함도 없지만 딱히 기다림의 시간도 없었다. 노력을 하지 않아도 나이는 먹을 수 있었고 부모의 부재는 국가라는 존재로 대신 채워 나갔다. 국가가 정의하는 돌봄은 죽기 전까지 최대한의 안위를 보장케하는 호스피스보다 선택의 폭이 좁다. 호스피스라는 것도 능력이 있고 그 가치를 인정받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내 몸뚱어리는 당장 죽는다는 보장도 없고 통증도 수반하지 않기 때문에 안위를 보장받지 못한다. 물론 불편함의 증거로 복지카드를 주었지만 그와 동시에 내 정체성과는 완전히 이별이었다. 그리고 발길질로 기억되는 가족이라는 개념의 아버지와는 더 이상 끝난 것이다. 정부는 부모의 역할을 대신했다. 부모의 역할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매 타작을 하고 종종 밥을 건네는 것인가? 밥을 주고, 돈을 준다는 뜻에서 보면 국가는 나에게 이전 부모보다 월등히 훌륭한 부모이다. 잔소리도, 폭력도, 학대도 없었다. 굳이 찾아본다면 ‘방임’ 정도겠지만 이전에도 방임은 있어왔다. 지난 가족의 방임은 더 큰 폭력을 위한 휴식시간이었던 반면에 국가가 선사해 준 방임은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폭력의 시간을 알리는 소리라면 전화 소리는 내가 메어있다는 것을 알리는 족쇄 같은 개념이다. 이 족쇄를 풀면 나는 새로이 태어나는 것일까? 나에게 선택의 기회가 있을까? 주어진 상황을 수용하는 일만이 있을 뿐이다.
녀석의 작은 앞발은 힘이 좋았다. 처음 내 허벅지를 작은 발로 눌렀을 때 느낄 수 있었다. 녀석은 내 몸 위를 오르거나 지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난 살아있는 생명체였지만 누워서 움직임 없이 평소와 같이 천장을 보고 있었고 그런 나를, 녀석은 천천히 밀기 시작했다. 녀석이 미는 힘은 내가 이겨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분명 누군가가 나를 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엔 충분했다. 나를 향해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그 이면에 있는 진실은 아직 보지 못했다. 아빠의 발길질이라는 행위가 폭력이라는 진실로 판명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만큼 사실을 아는 것은 무섭지 않지만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두렵다. 진실을 밝히고, 파헤치고, 들여다보고, 깨우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녀석이 이불 밖에서 3일을 보냈다는 것과 이불 위에서 다시 3일을 보내면서 물을 포함한 어떠한 영양분도 섭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처음 내 몸에 녀석의 다리가 닿았을 때 그간 보였었던 느릿하고 진중한 움직임은 온데간데없었다. 뒤늦게 목표를 깨우치기라도 한 듯, 아니면 애초에 목표가 이것이라고 생각이 될 만큼 6일간 보여줬던 행보와는 다른 움직임을 보였다. 앞발로 내 깡마른 허벅지를 밀면서 장애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나 보다. 그렇다면 돌아가거나 타고 넘어가도 됐을 테니까. 녀석은 앞다리로 밀고 뒷다리로도 나를 밀었다. 마른 허벅지는 딱딱한 구조물처럼 느껴질 수 있다. 난 녀석의 목표를 알지 못한다. 만약 나를 지나가거나 반대편으로 넘어가는 일이라면 기꺼이 응해줄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나라는 인간은 그러한 변화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기존에 해왔던 대로 누워 있기로 결심했다. 아침과 저녁에 한 번씩 화장실을 가지만 일부로 녀석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 화장실로 피신한 적도 있었다. 녀석의 행보를 위해 길을 터주었지만, 녀석은 내가 일어선 시점부터 다시 돌아올 때까지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무섭고 겁이 나서 굳어 버린 게 아니라, 정정당당함이란 이런 것이라며 나에게 알려주듯이, 내가 눕자마자 다시 동일하게 밀기 시작했다. 녀석이 날 깨물거나 할퀴진 않을까 걱정도 했지만 애초에 날 해할 생각이 있었다면 일주일씩이나 간을 보진 않았을 테다. 그만큼 내 전투력은 측정이 불가능했으며 하루에 3cm를 움직이는 녀석과 대치할 정도로 무기력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