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똥구리(1)

by 돌돌이

단편소설이며 매일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1.
5평. 방 한편엔 작은 벌레가 살고 있다. 바퀴벌레처럼 날래지도 않고, 돈벌레처럼 다리가 많지 않기에 녀석에게 다른 큰 불만은 없다. 원룸 엔 화장실이 딸려 있는데 그곳은 나와 바퀴벌레가 함께 생활하고 있다. 녀석들은 매너라는 듯이 낮에는 출몰하지 않는다. 반지하의 원룸에서 유일하게 빛이 들어오는 곳은 화장실의 창이 전부다. 이곳은 시계가 없다면 시간을 알 수 없는 공간이 된다. 바퀴벌레는 나의 생활 구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5평 방안에 녀석들이 다닌 흔적은 없다. 화장실에서만 녀석들은 생활할 뿐이지 내가 누워 있는 이불과 방 어느 한편에도 들어온 적은 없는데 이유는 모르겠다. 사실 내가 아는 건 하나도 없다. 이곳에 왜 있고 내가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냥 마지못해 살고 있고 죽지 못해 살고 있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최소한의 밥과 최소한의 수면으로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돈벌레라면 방 언저리에 있는 봉투를 노리고 왔을 것이다. 2년간 쓰지 않고 모아둔 봉투의 개수는 어림잡아 20개는 족히 된다. 그 안에 돈도 있을 것이고 종종 편지도 동봉되어 있다. 첫 달에 내용물을 확인한 뒤로 그냥 언저리에 올려 둔다. 봉투를 찢고 불태울 정도의 위인은 아니기에 한쪽에 고스란히 둔 것이다. 내 심장이 뛰고 있다면 봉투는 점점 쌓이게 될 것이다. 물론 나라에서 전쟁이 나거나 경제가 어려워져서 봉투가 더 이상 들어올 일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1년 전만 하더라도 거미과에 속해 보이던 녀석이 있었다. 거미과에 속해 보이던 녀석도 먹고살아야 했을 테니 그 어떤 생명체도 존재하지 않는 이 방 안에서 녀석은 3일을 버티다 사라졌다.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난 공간엔 내가 전부다. 방안을 들어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첫날 집주인 아주머니와 직접 계약을 하기 위해 방 안에서 도장을 찍은 이후로 단 한 번도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날 담당하는 사회복지사는 내가 굶어죽지 않게 매달 1일마다 문 앞에 쌀과 김치를 주고 간다. 물건을 두고 가면서 이따금씩 내 이름을 불러 생존 여부를 확인하기도 하지만 매주하는 통화해서 난 한 번도 놓치지 않고 안부 전화를 받아 왔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간간이 런천미트를 주고 갈 때도 있었으며 내가 밖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부터는 월세와 공과금을 제하고 남은 돈을 봉투에 담아서 넣어두었다. 이 지긋지긋한 세상은 내가 죽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하물며 인간답게 사는 것은 더더욱 허락하지 않는다. 지긋지긋한 이 세상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배를 채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자유대한민국의 위상이 이 정도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굶어죽지 않으며 가끔씩 통조림 고기 맛도 느끼게 해주며 더 가끔씩 어류인 참치 통조림도 준다. 배를 채운다는 것은 죽이지 않는다는 뜻이지 삶은 준다는 뜻은 아니다. 숨이 붙어 있다는 것이 삶을 누리고 있다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이 지긋지긋한 세상은 내가 생존에 있는지 궁금해한다. 일주일에 한 번씩 오는 안부 전화가 그것이다. 2년 만에 바뀐 새로운 목소리의 사회복지사는 목소리에 활기가 있다. 그 목소리가 잦아들고 지쳐버리기까지 일주일이면 충분하다. 무기력은 하품만큼 전파력이 강하니까. 이런 무기력을 품고 사는 이들의 목소리를 매일 듣게 된다면 그녀에게 무기력이 옮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야 세상의 지긋지긋함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방 한편에 있는 녀석의 이름을 알고 있다. 어렸을 때 봤었던 과학 도감의 한 틈새에서 녀석을 봤던 기억이 있다. 내가 알기로는 녀석이 이곳에 존재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녀석은 매일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 내가 자신을 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뒤로는 매일 자신의 영역을 넓히고 있다. 벌레가 징그러운 이유는 어렸을 때부터 학습되어온 결과이기도 하지만 흔히 볼 수 없어서다. 대놓고 사람처럼 걸어 다니고 사회생활을 하며 전화도 걸며 직장 상사의 욕도 하는 그런 존재였다면 징그럽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거다.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존재이지 징그러운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바퀴벌레는 보려고 하면 숨고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다. 녀석들이 하수구와 쓰레기 더미 옆 구석탱이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징그럽다고 여긴다. 만만하기 때문에 징그러움을 부여받는다. 한강뷰 아파트를 전액 현금으로 결제하는 바퀴벌레는 부러움과 질투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녀석들이 있는 곳은 내가 있는 이곳 원룸의 화장실이다. 한밤중에 화장실의 불을 켰을 때 수십 마리의 바퀴가 화장실에서 후다닥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나서부터 밤에 화장실을 가지 않는다. 아무리 급하고 마려워도 참고 견뎌서 아침에 간다. 그것이 녀석들과 내가 세운 암묵적인 룰이다. 이 룰은 법위에 존재하며 도덕보다 숭고하다. 녀석들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그들의 생활권과 삶을 인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양보하고 희생하여 서로의 존재를 인정했다. 즉, 공존을 택한 것이다. 작고 날쌘 이 녀석들을 쉽게 잡을 순 없으며 내가 이 많은 수를 컨트롤할 수 없기에 녀석들은 나와 함께 살고 있다. 징그러운 세상에서 나는 공존이라는 새로운 이상향을 제시한 것이다. 이 세상을 묘사하는 수많은 말들 중에 징그럽다는 표현이 딱 적당하다. 한 번씩 무자비하고 잔인함을 보여주긴 하지만 내가 세상에 눈과 귀를 닫고 나서부터 이런 냉혹함을 느끼기보단 무책임함을 느끼고 된다. 이런 무책임함을 비웃듯이 징그러운 이 세상은 나라는 존재를 잊지 않는다. 밥과 김치로, 혹여나 자신이 생각한 그 책임에 부족하다고 생각이 들 때면 흰 봉투에다가 아주 작은 일말의 동정을 담아 동봉하는 것이다.

그 녀석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거미과에 속해 보이던 녀석 또한 나타날 공간은 없었다.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궁금하지 않다. 화장실일 가능성이 가장 크지만 바퀴벌레들이 녀석이 들어오는 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을 터다. 사실 녀석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중요치 않다. 나도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으니까. 날 낳아준 부모도, 그 부모를 낳아준 부모도, 그 부모의 부모도 죽지 않고 나를 이 땅에 싸질렀다. 아담과 이브에 맞닿아 수만 년간 그들의 유전자와 정신을 나에게 전달해 줬지만 내 선에서 그 유전자의 전달은 끝이 난다. 6개월째 입주자가 없었던 볕이 들지 않는 200에 20짜리 원룸에서, 내 유전자가 이어질 거라곤 생각치 않으니까. 5분만 걸어도 마을버스가 다닌다고 집주인은 설명했었지만, 그녀의 5분과 내 5분은 차이가 있나 보다. 마을버스는 30분에 한 대씩 오기 때문에 시간분배를 잘 할 수 있다는 주인의 말을 듣고 이곳을 낙점한 것은 아니다. 서울이라는 행정구역에서 6개월 인적이 없이 방치된 공간이었으며, 집을 보러 온 그날 집주인의 그 간절한 눈빛이 징그러웠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