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브런치 소개란을 보면 '그리스인 조르바' 전문가라고 적어놨다. 정말 내가 '그리스인 조르바'의 전문가 일까? 전문가라고 명명하기엔 관련 학위나 논문 등의 객관적인 근거는 전혀 없다. 대신 주관적인 입장에서 이야기해 본다면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책을 상대적으로 많이 읽은 편에 속한다. 희랍인 조르바라고 번역되어온 과거의 책들부터,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그리스어로 쓴 원전을 번역한 유재원 교수가 옮긴 책까지. 한국어로 유통되는 책들은 대부분 읽어 보았다. 그리스어로 쓰인 원본은 영어나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 출간됐고, 다시 그 책은 국문으로 중역되어서 우리나라에 출간되었다. 읽다 보니 영어로 번역된 내용도 궁금해서 영어 서적도 읽었는데, 어떤 표현을 묘사하는지 구절이 익숙해져서 단어를 잘 몰라도 파악할 순 있었지만 번역자가 중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번역본 중에선 이윤기 선생님이 초판에 번역한 책을 가장 좋아한다. 번역자가 젊었을 때, 열정적으로 쏟아내던 문구는 원전의 어감과는 다르지만, 등을 긁어주는듯한 시원한 표현이 좋았다. 한 번을 읽고 천 번을 읽더라도 자신이 느끼는 바와 깨달음의 깊이는 다르다. 내가 생각하는 조르바의 모습과 사람들이 생각하는 조르바의 모습이 다른 것처럼. 여러 사람들의 후기도 읽어보고 서평도 보면서 조르바를 생각하는 관점은 누구나 다르며 주는 울림 또한 다르다는 걸 깨닫는다. 단순한 난봉꾼으로 보는 사람도 있었고, 명사들의 추천으로 유명해진 고만고만한 소설이라고 명명하는 사람도 있다. 반페미니스트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고 단순히 돈과 여자를 쫓아다니는 속물의 전형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유야 어찌 됐든 저마다의 관점으로 조르바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은 1900년도 초반의 이야기를 다룬다. 1946년도에 초판본이 나왔으며 작가는 그전부터 조르바와 함께 사업을 하며 그를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하려 애썼다. 지금 시점에서 조르바를 볼 수도 있지만, 시대의 상황을 생각해서 책을 들여다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예를 들어 퇴계 이황의 학문적인 성취와 정치적인 영향력을 배제하고 노비 상속을 당연시하는 노예제의 화신이라고 명명해 버리면 어떻게 될까? 당시 노비를 세는 단위는 명이 아니고 구였다. 당연히 퇴계 이황은 노비를 재산의 개념으로 '구'라는 표현을 쓰며 자식에게 물려준다. 다시 조르바로 돌아가서, 조르바라는 존재를 이야기하면서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해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소설 속의 인물이지만 작가는 실존 인물인 조르바라는 사람과 함께 일을 하고 시간을 보낸다. 니체, 베르그송과 동일한 선상에 조르바를 두고 추앙할 정도로 그에 대한 존경심과 애정이 있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의 근현대사에서 문화, 교육, 정치에 이르기까지 항상 언급되는 인물이다. 그런 그의 문학작품들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팬이 선포한다. 이제는 광팬인 내가 읽고 보고 느낀 조르바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 더 이상 조르바가 밑도 끝도 없이 까이는 꼴을 참을 수 없다. 아쉽게 팬덤은 만들지 못했지만(?) 세계 곳곳엔 조르바를 사랑하는 샤이 팬들이 존재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