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을 샀는데

by 돌돌이


홈플러스에서 수박을 샀다. 행사 제품보다 가격도 비싸고 고당도 프리미엄이라는 제품 설명이 붙은 수박 선별사의 얼굴은 믿음을 주었다. 20000원이 넘는 가격이지만 5월에 맛보는 수박을 기대 반 설렘 반으로 구매를 했다. 수박을 좋아하기도 하고 달달하고 포만감이 크니 간식과 주식을 겸하는 내 특성상, 여름 한철에 한해서 우리 집 냉장고에 김치와 함께 동등한 자격의 지분을 주는 녀석이다.


1588428842982.jpg?type=w1


함안 조공 수박 선별사 진영우님이 자신 있게 추천한 수박 안은 노란 선들과 함께 물 빠진 분홍색을 띠었다. 딱 보기에도 설익은 색이었고 고당도라고 하기엔 여름에 트럭에서 파는 수박보다도 색도 연했고 달지 않았다. 고당도 프리미엄이라 칭하기엔 당도도 식감도 색감도 부족했고 과일이 아닌 채소를 먹는 느낌이었다. 내 건강을 생각해서 홈플러스에서 이렇게 만든 걸까? 프리미엄이라는 단어와 수박 선별사의 얼굴이 주는 신뢰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물론, 장점도 있었다. 씨가 많지 않아서 좋았다. 그걸로 끝. 하지만 검은 씨앗이 많이 없다는 것이지 노란 씨앗은 가득했다. 아직은 수박을 먹을 시기가 아니었던 걸까? 한 달 만 더 기다렸어야 했나? 수박 선택을 잘못했는지, 그냥 전체적으로 수박의 질이 나빴는지는 모르겠지만 수박을 먹어보곤 와이프는 생각보다 수박이 나쁘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느낀 올해 첫 수박의 맛은 C-. 9900원에 샀더라면 만족했겠지만 2만 원이 넘는 가격을 주고 사 먹는 맛은 아니었다. 싼 수박을 고르자던 와이프의 의견을 애써 반려하고 비싼 게 맛난 거라며 실해 보이는 수박을 챙겨 온 내 모습이 오버랩 된다.


1588428844090.jpg?type=w1


싼 게 비지떡이란 말이 있다. 물론 보는 게 전부는 아니지만 수박에 버젓이 붙은 얼굴과 프리미엄이라는 단어는 많은 것을 나타낸다. 생산자와 검수자가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면서 믿음을 주는 마케팅은 어느 순간부터 당연해져 버렸다. 마케팅의 영역을 벗어나서 사건이 발생했을 경우 책임소재를 명확히 하자는 뜻으로 느껴진다. 이유야 어쨌든, 오늘의 선택으로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이번 소비 실패가 앞으로 있을 여름 수박 구매 장소를 바꾸게 만들었다. 3일에 한 통씩 해치우는 수박 성애자를 홈플러스는 잃은 것이다. 솔직히 나 한 명이 사지 않는다고 홈플러스 매출에 영향이 있겠냐 만은 여름 한철 동안 먹는 수박만 하더라도 20통은 족히 될 테니까.


이마트 가야지. 흥.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민식이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