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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랑바쌈 Dec 15. 2020

"왜 우리는 국가가 될 수 없나?"

넷플릭스 영화 <로즈 아일랜드 공화국>에서 본 국가의 역설

"아프리카는 55개국이 아니라 54개국이지요."

작년 말 아프리카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한 세미나 발표를 마치고 나가려는데 객석에 앉아 있던 한 흰색 피부의 아프리카인이 다가와서 조용히 건넨 말이다. 예상대로 모로코인이었다.  발표 중에 내가 '아프리카 55개국'이라고 표현한 것이 걸렸나 보다. 아프리카 국가수는 55개국이 될 때도 있고 54개국이 될 때도 있다.

기준이 되는 국가는 <서사하라>이다.

서사하라는 자치정부가 존재하지만 모로코와의 영토분쟁으로 아직 UN으로부터 정식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요즘은 대개 서사하라를 포함해 55개국으로 얘기하지만 여전히 모로코인 앞에서는 주의가 필요하다. 서사하라처럼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나라는 아직도 제법 있다.

매일경제 2011년 9월 28일 기사 지도 발췌

(이하 영화 내용이 언급되니, 관람 전이신 분은 참고하세요. 실화 기반이라 스포의 의미는 별로 없지만)

이탈리아 인근 공해상 백 평 남짓 크기의 작은 인공 섬(플랫폼)이 만들어지고 국기가 걸렸다.

국가명은 '로즈 아일랜드 공화국'

인공섬을 직접 제작한 주인공 조르조는 스스로 대통령이 된다.

제일 처음 한 일은 바다 밑에서 지하수를 끌어올려 먹을 물을 조달하는 것이었다.

디스코텍과 도박판, 우체국까지 생겼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각국 국민들로부터 시민권 신청이 쇄도한다.

대통령 조르조는 진정한 국가로 인정받기 위해 UN의 문을 두드린다.

언론 지면은 '로즈 아일랜드' 기사로 도배되었다.

처음엔 장난처럼 생각했던 이탈리아 정부가 발칵 뒤집혔다.

온갖 협박과 회유를 통해 이 공화국 프로젝트를 무산시키려 한다.

결국 조르조는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유럽평의회까지 찾아가 중재를 요청한다.

실화에 기반한 영화의 스토리다.

로즈 아일랜드 공화국에 몰려드는 사람들

이 억지스러운 '국가만들기'를 UN이나 유럽평의회 같은 국제사회가 적극적으로 무효화하지 못한 것은, 그리고 이탈리아 정부가 마지막까지 무력사용(결국 했지만)을 주저한 것

로즈 아일랜드가 어떤 국가의 관할권도 미치지 않는 공해상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누군가 우주로 가서 작은 정거장을 만들고 그곳을 국가라고 명명한다면 누가 아니라고 할 자격이 있을까.

과거 제국주의 열강들이 전 세계 대륙을 돌아다니며 깃발을 꼽고 '여기는 우리 땅'이라고 찜할 수 있었던 것도 당시까지 아무도 관할권을 주장한 적이 없는 땅이었기에 때문이다.

결국 이탈리아는 로즈 아일랜드를 자신의 관할권이라고 주장하지 못한 채

침공이라는 방식으로 이 작은 공화국을 파괴한다. 해군 함정까지 동원해서.

이탈리아 국민들이 이 섬을 통해 도박과 탈세를 일삼는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영화 말미에 6명의 공화국 시민들이 날아오는 포탄을 향해 손에 손잡고 서서 연대할 때는 독립투사의 애국심마저 엿보인다. 국가의 3요소인 영토, 국민, 주권 중에서 마지막인 주권의식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번호판이 왜 필요하지?

조르조는 재주 많은 천재 지니어였다.

그는 자동차 모양의 탈 것을 직접 제작해 타고 다니다가 경찰한테 '번호판'이 없다는 이유로 압류당한다.

엔진이 있어 달릴 수 있는데, '번호판이 도대체 뭐길래 창조한 것을 무효로 만들 수 있는가?'

엔지니어 다운 질문이다. 번호판이 있는 차와 없는 차는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른가?

그는 스스로 번호판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행동에 옮긴다.

인공섬은 그가 창조한 또 하나의 자동차였고, 로즈 아일랜드라는 국가명은 그가 붙인 번호판이었다.

조르조가 직접 만든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경찰의 심문을 받는다

관할권이 미치지 않는 공간에서의 사적 창조는 지금도 종종 이루어지고 있다.

누군가 사이버 공간에서 '가상화폐'라는 것을 만들고 이것을 거래에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발행량이 한정되어 있는 이 화폐는 보유하려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가치가 급등했다.

다양한 종류의 가상화폐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실물 거래에 사용되기에 이르렀지만 어떤 정부도 이 화폐를 '무효'라고 규정할 수 없었다.

관할권이 없는 온라인 영역에서 창조된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오직 자국 화폐를 찍어내고 회수할 수 있을 뿐이다. 

화폐가 통용되는 것은 정부가 그 가치를 보증하기 때문인데, 가상화폐는 어떤 정부로부터도 가치를 보장받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신뢰성을 확보했다. '블록체인'이라는 기술 덕분이었다.

1960년대 천재 엔지니어가 자신의 기술로 공해상에 영토를 만든 것처럼, 반세기가 지난 지금 블록체인이라는 기술은 인터넷이라는 공해상에 통화를 만들어냈다.

영화에서의 로즈 아일랜드처럼, 가상화폐는 이 시대 통화당국에 골칫거리가 되었고 전 세계 정부들은 관할권 부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마흔이 넘어 넷플릭스에서 이탈리아 영화라니..

내가 본 이탈리아 영화는 <시네마 천국> 그리고 <인생은 아름다워>가 전부였다.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을 밝혀준 울림 있는 명작들이었다.

두 영화같은 울림은 없지만 <로즈 아일랜드 공화국> 역시 이탈리아 영화만의 독특한 진정성이 묻어난다.

억지스러운 유머도, 격정적 맬로도, 화려한 판타지도 없지만,

영화는 꼭 필요한 컷으로도 모든 메시지를 전달하고 조용한 울림까지 담아낸다.

초능력 히어로, 판타지, 살인, 폭력과 마약, 신파 등 온갖 자극적인 소재에 길들여진 관객들에겐 좀 심심할 수도 있겠다. 단짠단짠 한 맛은 없다. 조미료 없이 채소 육수로 끓여낸 담백한 국물 맛이 이 영화의 맛이다.

하지만 기억하자. 히어로물 못지않게 충분히 비현실적이며, 실화라는 점에서 더욱 극적이라는 사실을.

'국가란 무엇인가' '제도와 기술의 부조화' '국제질서와 관할권의 문제'

이런 거창한 담론까지 끌어들일 것 없이, 한 인간의 호기심과 거침없는 실험 앞에 벌벌 떠는 세상을 구경하는 재미로도 충분하다.


로즈 아일랜드 실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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