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는 왜 아직 가난한가?

존 쿳시의 소설 '야만인을 기다리며'에 나타난 이방인의 오류

by 그랑바쌈
“하이에나가 울부짖을 때는 엉덩이에 무엇이 박힌 것이다.” - 벰바족


가족과 휴가차 온 남아공 케이프타운의 12월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하다.

성능 좋은 카메라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충분히 압도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내가 사는 서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의 12월과는 완벽히 대조적이다.

고철택시에서 뿜어져 나오는 쾌쾌한 매연과 사하라사막에서 불어오는 오염된 모래바람(아르마땅이라고 부른다)이 뒤섞여 피부염, 인후염, 재채기를 액세서리마냥 달고 사는 아비장(Abidjan)에서 보면 이곳은 완전히 딴 세상이다.


케이프타운은 한국에서도 인기 있는 여행지로 각광받고 있다.

한 케이블 채널 아프리카 여행 프로그램을 통해 유명한 연예인들이 다녀가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똑같이 아프리카라고 부른다. 이런 아프리카든 저런 아프리카든.

말라리아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 가는 서아프리카나, 숨만 쉬어도 힐링이 되는 케이프타운도 이방인의 눈에는 똑같은 아프리카다.

대서양과 인도양이 만나는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 희망봉, 끝없이 펼쳐진 해안선을 바라보며 병풍처럼 나란히 서있는 12사도 봉우리, 그리고 테이블 마운틴 정상을 빙 둘러 에워싸고 있는 구름기둥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신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곳 케이프타운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세계적인 문학가 존 맥스웰 쿳시(J.M Coetzee)의 고향이다.

남아공 케이프타운 희망봉

아프리카에 와서 뒤늦게 그의 대표작인 『야만인을 기다리며』를 읽고 나는 꽤나 큰 충격을 받았다.

아프리카에 대한 나의 편협한 인식에 수치심을 안긴 책이다.

이 책을 읽어 본 사람들은 ‘야만인’을 향한 두 개의 시선을 발견한다. 첫 번째는 졸 대령의 시선이다. 그에 따르면 야만인은 미개하면서도 공격성을 가지고 있어 위협적인 존재다. 문명인들의 제국을 수호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제압하고 통제해야 될 대상이다.


두 번째는 또 다른 인물인 치안판사의 시선. 야만인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으며 제국주의자들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라는 것. 졸 대령이 야만인으로 지칭하는 그들은 그저 변방의 유목민에 불과하며 전혀 공격적이거나 위협적이지도 않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다.


이 양극단에 서 있는 두 시선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다.

이미 우리 안에는 특정 지역이나 종족집단을 졸 대령처럼 ‘야만인’으로 바라보는 제국주의자의 모습과 이런 과오에 대해 회고하고 반성하는 치안판사의 모습이 공존한다.

내가 주목한 부분은 ‘치안판사’의 또 다른 시선이다.


치안판사는 야만인의 존재를 부정하면서도 야만인으로 잡혀와 극심한 고문을 받고 장해를 갖게 된 한 여자 포로에 대해 강한 집착을 보인다. 설명할 수 없는 집착이다.

판사는 고문으로 인해 뒤틀린 여자의 발목과 멀어져 버린 눈에 유난히 집착한다. 그는 여자가 당한 고문에 대해 집요하게 묻는다. 그것이 아프지 않았냐고. 진상을 밝히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심문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 상처만 계속 매만진다. 침대에 누운 여자에게 오일을 발라 주는 행위는 육체적 결합의 전희가 아니라 상처를 치유하는 거룩한 의식이다. 그래서 판사의 욕망은 끝을 보지 않는다.


“내가 그녀에게 끌린 건 그녀의 몸에 난 상처 때문이었는데 그 상처가 충분히 깊지 않다는 걸 알고 실망했던 걸까. 너무 많거나 너무 적은 걸까. 내가 원하는 건 그녀일까 아니면 그녀의 몸에 배어 있는 역사의 자취들일까.” (『야만인을 기다리며』 치안판사의 독백 발췌)


아프리카를 대하는 우리의 시선은 어떠한가? 제국주의자들이 아프리카에 남긴 상처를 연민하고 치유하고픈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건 아닐까. 치안판사의 고백처럼 그 상처가 크고 깊어야만 치유의 욕망은 비로소 충족되는 것인가. 혹시 소설 속 여자 포로의 무기력과 우울함이 판사가 집착한 상처의 탓이 아니듯 아프리카가 긴 세월 헤어 나오지 못한 빈곤의 함정 역시 식민역사의 상처 때문이 아닐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아프리카를 야만인의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이 대륙을 ‘치안판사’처럼 일방적으로 연민하는 것은 위험한 행동이다. 치유해야 될 상처가 남아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다만 그 상처가 오늘날 아프리카가 당면한 문제의 본질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여자 포로는 이미 지나간 고문의 상처를 치유받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한 여자로서 평범한 사랑을 원했다. 치안판사는 그걸 무시한 채, 벌어진 상처에만 집착했다.


아프리카는 세계에서 빈곤율이 가장 높고 경제구조도 절대적으로 취약한 지역이다.

이런 경제문제의 근본원인을 야만성에서 찾는 것은 그 자체로 야만적이며 어리석다. 아프리카에서 종종 지적되는 정부와 공무원의 부패나 비효율적인 관료주의, 정치적 불안의 원인을 종족적 야만성에서 찾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야만성은 아프리카만의 것이 아니다. 부패와 관료주의는 정도와 모양의 차이만 있을 뿐 어느 지역이나 국가에도 있으며 한국의 경제개발사도 여기에서 자유롭지 않다.


아프리카의 발전이 정체된 원인을 식민지 수탈의 관점에서 찾으려는 시도 역시 식상하고 진부하기 그지없다. 정치적 독립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독립은 이루지 못했다고 동정하는 여론은 아프리카의 가난에 당위성을 부여해 왔다. 이런 동정론은 유효기간도 없단 말인가. 아프리카 대부분의 국가들이 독립한 지 60여 년이 지났다. 아직까지도 아프리카에 경제적 종속이란 것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아프리카 정치지도자들의 선택일 뿐 식민지배자의 일방적인 힘이 작용한 결과는 아니다.


아프리카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국제사회의 원조가 쏟아진다. 정부 차원의 유무상 원조, 국제기구를 통한 각종 금융지원, 다양한 NGO 구호활동. 이런 원조는 어쩌면 상처를 쓰다듬는 ‘치안판사’의 손길 같은 것이어서 아프리카 경제문제의 본질을 해결하기보다는 쓰다듬는 손의 욕망을 채울 뿐이다. 정작 치유시키지는 못하면서. 기껏 치유한다는 것도 말기 암 환자의 발가락에 난 찰과상을 낫게 해주는 정도라면.


잠비아 벰바족에 “하이에나가 울부짖으면 엉덩이에 뭔가가 박힌 것이다”라는 속담이 있다.

가시 박힌 하이에나에게 먹을 것을 준다고 고통이 덜어지지 않는다. 박힌 가시를 빼는 것이 먼저다.


* 이 편은 제 책 <아프리카, 미필적 고의에 의한 가난> 프롤로그를 발췌/각색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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