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은 닫고 지갑은 열기

청춘과 소통하는 지혜

by 그랑바쌈

20대 직원들과의 점심은 아주 드물게 찾아오는 기회다. 지갑에서 돈이 나가지만 젊음과 소통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타인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픈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지만 나는 그것이 좀 강한 편이다. 유쾌한 식사자리에서 이런 욕구를 발산하면 '꼰대'가 되고 만다는 걸 잘 안다. 늘 조심하는 편이다. 그냥 입을 다물고 듣는데 집중하자. 고개만 끄덕하자. 그런데 이게 잘 안될 때가 가끔 있다. 주니어의 관심사는 재테크, 여행, 연애(결혼 말고), 직장에서 혼내주고픈 상사.. 이런 것들이다., 처음엔 그럭저럭 잘 받아주다가도 분위기가 좀 무르익으면 나도 모르게 어느새 선을 넘는다. 돈보단 가치를 지향하기, 목적이 있는 삶, 왜 사느냐의 문제로 문턱을 넘어가는 순간 아차 싶다. 그들의 동공은 이미 초점을 잃고 영혼은 유체이탈을 시도한다. 재미있게 말하는 재주라도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점심 한 끼로 이런 따분함을 안겨 미안할 따름이다. 그래도 계산은 내가 하잖니.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는 말은 항상 옳다. 내 주관적인 성찰의 결과를 시대적 배경부터가 다른 상대에게 전달해 공감과 수긍을 얻어내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어리석은 것이었다.


<아기공룡 둘리>라는 국산 만화영화에서 등장인물 아니 동물 중 하나가 가수 GOD의 노래를 불렀는데 아이들이 그 멜로디와 가사가 재미있었는지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어머님은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야이야이야아 그렇게 살아가고 그렇게 다시 웃고.." 대충 이런 가사다. 나도 아이들 앞에서 이 노래를 읊조린 적이 있다. 닭강정을 시켰는데 양이 좀 모자랐던 날이었다. 난 조금 먹는 시늉을 하다가 배가 부르다며 젓가락을 놓았다. 아이들은 경쟁자 한 명이 사라진 것에 안도하며 더 열심히 먹어댔다.

"얘들아, 이 노래에서 엄마가 왜 자장면이 싫다고 했을까?"

"중국음식을 별로 안 좋아하나 보지 뭐."

"느끼해서?"

내가 애써 입맛 다시는 시늉을 하자 그제야 큰딸이 유레카를 외치듯 말했다.

"아하 그게 그런 뜻이었어?"


내려올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짧은 길이로 알려진 고은 선생의 시다.

아이들에게 뜻을 물어본 적이 있다.

시 뜻풀이에 정답은 없지만 아이들의 대답은 놀라웠다.

"봉오리였다가 꽃이 갑자기 딱 핀 거지"

"오를 땐 누가 안 보이게 감춰둔 건가?"

아.. 정말 모르는 것이었던 것이었다.


한창 올라가는 이들에게 '그 꽃'을 보았냐고 묻는 실수를 많이 한다. 나도 오를 땐 정신 팔려 보지 못한 그 꽃을 그들이 어찌 보았으랴. 간혹 총기가 예사롭지 않은 청춘을 만나면 난 유혹에 빠질 때가 있다. 이 친구라면 꼭 그 꽃을 보았거나 그것의 가치를 알고 있으려니 하는 착각에 빠져 실없고 맥 빠진 얘기에 열을 올리기 시작한다. 부질없는 짓이다. 이삼십 대부터 꼰대 이야기 듣기를 좋아했던 나로선 그렇게 착각할 만도 하다. 억울하다.


나이가 많다고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은퇴 직전까지도 돈과 명예, 말초적인 욕망만을 입에 담고 추종하는 선배들을 지겹게 보았다. 죽을 때까지 이걸 꽉 쥐고 사는 분들도 있다. 그래도 내 주변엔 지혜로운 어르신들이 있어 다행이다. 일면식도 없고 책이나 영상을 통해 만나는 분들이지만 인생을 관통하는 깊은 통찰에 위안을 받는다. 비싼 밥 안 사주셔도 똘망똘망한 눈으로 밤을 새워 경청할 준비가 나는 되어있다. 나는 지혜롭지 않지만 지혜로움의 가치를 안다. 나보다 나이가 곱절 이상 많으신 김형석 교수님의 어록은 요즘 나의 최애다. 투박하지만 백세라는 세월이 주는 묵직한 울림이 어떤 자기계발서보다 와 닿는다.


"인생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

"힘들어도 사랑 있는 고생이 행복이었네"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보다 공동체에 얼마나 기여했느냐가 중요하다네"

"빈손이 된 마지막 순간, 진심을 담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그 인사받을 수 있는 인생이 보람 있는 인생이지."

감사 인사받을 수 있는 인생. 나의 이생이 누군가에게 감사함으로 기억된다는 것만큼 황홀한 일이 있을까. 허나, 이 얘기는 앞으로 절대 꺼내지 말아야겠다. 백세가 될 때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