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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랑바쌈 Sep 22. 2021

차가운 멸치국수의 맛

익숙함에서 한 발짝 나아가는 지혜

냇가국수.

남해대교 부근 부모님 산소에 가면 늘 들르는 국숫집이다. 아래로 훤히 펼쳐진 바다 외엔 물이라곤 눈을 씻고봐도 없는데 왜 냇가국수인지 모르겠다. 남해 멸치로 우려낸 국물이 일품이다. 탱글탱글한 면발은 새색시 입술처럼 부드럽다. 주인장이 직접 키운 각종 채소를 채 썰어 넣은 고명은 면에 살살 감겨 기분 좋게 입속에 넘어온다. 한 그릇에 5천 원. 그나마 몇 년 새 많이 오른 가격이다. 마을 공동묘지 너머 양떼목장이 관광명소가 되면서 목장을 찾은 가족들의 필수 점심코스가 되었다. 올추석엔 작년과 달라진 것이 두 가지 있다. 야외 테이블이 그중 하나다. 머리 위에 주렁주렁 열린 다래 넝쿨이 구수한 국물 맛에 운치를 더한다. 두 번째는 메뉴의 변화다. 구수한 멸치국수와 꼬소한 냉콩국수가 이 집 메뉴였는데 콩국수가 빠지고 여름 메뉴로 냉국수가 들어왔다.


어라.. 차가운 멸치국수라니. 냉장고에 보관 중인 멸치육수를 보리차로 잘못 알고 마셔본 적이 있다면 알 게다. 찬 멸치육수는 비릿하다. 뜨거운 육수는 비릿함이 증발하면서 고소함이 되어 후각을 자극하지만 찬 멸치육수는 그 비릿함이 갓 잡아 올린 생선 비늘처럼 살아있다. 모름지기 차가운 멸치국수란 차가운 돼지국밥, 차가운 삼계탕, 식은 스테이크만큼이나 예견되는 실패다. 식스센스라는 TV예능이 있다. 실제 존재하지 않는 가짜 식당을 가려내는 프로그램이다. 몇 주 전 나는 '냉자장면을 만드는 중식당'이 가짜라는 걸 족집게처럼 맞췄다. 참가자들은 너무 맛있어 가짜일 리 없다며 호들갑이었지만 그건 맛의 문제가 아니다. 음식에서 맛보다 온기가 더 중요할 때가 있다. 그 온기 때문에 찾는 음식이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뉴판도 없이 달랑 국수 하나고집해온 국수 장인의 집에서 내어놓은 냉멸치국수라니.. 뭔가 있지 않을까. 이 또한 충분히 합리적 의심이다. "자 이럴 땐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아이들에게 던진 질문이다. 선택의 이유도 제시해보라고 했다. 온국수로 통일, 반반, 3:2..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결론은 아빠의 독재다.


얘들아. 들어봐. 모두 따뜻한 국수로 통일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없어. 따뜻한 잔치국수가 맛있다는 사실 그리고 찬 멸치육수가 비리다는 정보를 이미 알고 있잖니. 굳이 차가운 국수를 선택할 이유가 없지. 그래도 한 그릇 정도는 냉국수를 시켜보는 게 좋다는 게 아빠 생각이야. 안 그러면 계속 그 맛이 궁금할 테니까. "그 집 냉국수라면 비리지 않으면서도 차가운 맛을 잘 살렸을지도 모를 텐데" 하는 생각말이야. 냉국수가 예상대로 맛이 없다면 어쩌냐고? 걱정 마. 따뜻한 국수 네 그릇을 다섯이 나눠먹으면 그럭저럭 배를 채울 수 있지. 만약 예상과 달리 냉국수가 대성공이라면? 그건  수확이지. 다음부턴 안심하고 맘껏 양 껏 냉국수를 시켜도 되는 거지. 안전한 선택만 하면 종종 찾아오는 새로운 기회를 놓치게 다. 이 한 그릇의 냉국수가 익숙한 자리에서 한걸음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얘기지. 절대 잊지 말 것은, 확실한 네 그릇의 온국수를 확보하는 것이 먼저라는 거야.


"아빠,  소리야. 나 면이 부족해."

참 실없다. 정신없이 후루룩 국물 들이키는 애들 앞에서 뭣하자는건지.

"어, 그래 아빠꺼 좀 더 먹어."

그렇게 실없다싶으면서도, 아이들 머릿속 어딘가에 있을 기억의 노트에 한줄한줄 기록하듯 말한다. 

언젠가 차가운 치국수 같은 애매한 선택의 순간을 맞이할 때 번뜩 떠오르길 기대하며.

"아 맞다 아빠가 그랬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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