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스필버그 영화 A.I. 의 마지막 장면은 일상 중 이따금씩 떠올라 인생의 이정표가 돤다.(스포일러 유)
불임인 부부가 A.I. 그러니까 인조인간 아이를 입양한다. 아이는 엄마와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인간의 감정을 느낄 순 없지만 사랑받는 기쁨을 누린다. 진짜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버림받은 AI 소년은 엄마를 그리워하며 온갖 고초를 겪는다. 시간이 흘러 몇천 년이 지나고 지구 상에 인류가 사라지고 어떤 생명도 존재하지 않게 될 무렵, 외계인들이 지구를 찾는다. 바다 깊은 곳에서 아이를 건져낸 외계인들은 이 불쌍한 아이의 소원 한 가지를 들어주기로 한다.
엄마를 만나게 해 주세요.
외계인들은 유전자 기술로 엄마를 복제해내고 아이에 대한 기억까지 재생시킨다. 그런데 되살린 엄마는 단 하루만 살 수 있다.
그렇게 아이에게 엄마와의 하루가 주어졌다. 장롱에 숨기, 책 읽어주기.. 그렇게 까르르 까르르 웃음으로 가득 찬 평범한 일상이 지나갔다. 엄마는 잠이 온다고 했다. 너무 졸려 견딜 수가 없다며 깊은 잠에 빠졌다. 아이도 함께 잠든다.
원이가 새벽에 나를 흔들어 깨웠다.
"아빠 특훈 가야지"
전날 일이다.
곧 반대항 피구대회가 있다며 비치볼을 던져 달란다. 볼을 피하는 훈련이란다. 공 튀기는 소음이 심해서 애를 데리고 아파트 커뮤니티센터 스포츠룸에 갔다. 공을 이리저리 던져줬다. 요리 조리 피하다 얼굴에 맞아도 공을 잡다가 손가락이 꺾여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더 세게 던져달란다. 아이는 피구왕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다. 목덜미에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아빠, 이거 완전 특훈인데"
이대로 가면 국가대표라도 될 기세다.
그런데 아빠 코치가 문제다.
얼마나 던졌을까. 슬슬 체력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이게 보통 일이 아니다. 그나마 아침 조깅으로 다진 기초체력이 아니었으면 애초에 숨이 차 나자빠졌을 게다.
"그만 하자 아빠 힘들어"
그날 밤은 잠이 스르르 들었다.
새벽이 될 때까지 식지 않은 아드레날린이 원이를 다시 깨웠다. 꼭두새벽에 기상한 원이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 미안했던지 아침 6시가 되는 걸 보고야 나를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아빠, 특훈"
그러면 나는, 피곤한데 왜 귀찮게 하냐는 생각이 뇌리에 아주 잠시 들어왔다가도, 아들과 보낼 단 하루를 허락받은 영화 속의 엄마에 빙의되어 눈을 번쩍 뜨고 만다. 옷을 주섬주섬 입고 비치볼을 챙겨 들고나간다.
옛다 받아라. 힘껏 볼을 내던진다.
"공을 끝까지 봐"
"다리를 움직여서 피해야지"
아마 다음날을 기약할 수 없다면 더 열심히 던졌을 것이다. 그렇게 마구 공을 던진 날의 밤은 단잠에 빠진다.
백 년을 사신 김형석 교수는 사랑 있는 고생이 행복이라고 했다. 공던지기는 나에게 고생이고 이 고생은 오직 사랑 때문이니 이건 틀림없는 행복일 것이다. 이 행복으로 단잠에 들 수 있으니 그 또한 행복한 결말인 셈이다.
하루나 백 년이나 창조주한테는 하루살이 인생이다. 그 하루라는 평생에, 평생이라는 하루에 나는 고생 있는 사랑을 충만하게 담아내고 후회 없이 스르르 눈이 감겨 단잠에 빠질 수 있을까. 바람이 죄가 될까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