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아, 그 빠에야를 시키지 마오> 브런치 북 맺음말
2012년 8월, 스페인어라고는 'Hola!' 밖에 모르던 내가 스페인어를 배워보겠다고 혈혈단신 스페인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내가 공부했던 곳은 스페인 그라나다(Granada)라는 지방 소도시였다. 처음 그라나다에 도착했던 여름의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한 여름의 스페인은 저녁 9시가 넘은 시간이었는데도 36도의 찌는 듯한 더위를 선사했고. 늦은 밤인데도 여전히 밝았던 저녁 풍경이 마냥 신기했다. 숙소에 도착하여 씻고 짐을 푸니 밤 11시가 되었다. 시차로 인한 피곤함보다 배고픔이 더 크게 느껴졌다. 20유로짜리 지표 1장을 들고 숙소 밖을 나섰다. 그때 생전 처음으로 갔던 스페인 그라나다의 작은 식당은 아직도 내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동서남북도 모르는 상태였던 나는, 그냥 사람이 많아 보이는 골목 식당에 들어갔다. 자리를 잡고 메뉴판을 보는 순간, 멘붕에 빠졌다. 모든 메뉴가 다 스페인어로 적혀 있었고, 사진도 없어 이 음식이 어떤 음식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영어 메뉴판은 물론이고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당시 스페인은 인터넷 접속도 원활하지 않아서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한마디로 스페인어를 모르는 외국인에게는 불친절한 로컬 식당이었다.
눈치껏 주변 테이블을 열심히 살펴보며 사람들이 가장 많이 주문한 음식과 가장 맛있어 보이는 음식이 무엇일까 쭉 스캔을 했다. 그러나 당시 용기가 없었던 나는, 스페인어로 주문하는 것이 두려워 그냥 맥주 한잔을 주문하고, 타파스로 공짜로 줬던 하몽과 치즈가 올라간 빵으로 대충 '때웠다'. 거의 18시간 만에 한국을 떠나 스페인 식당에 왔는데 첫 끼니가 느끼한 치즈와 하몽이 올라간 빵쪼가리라니,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얼른 스페인에 적응하여 이곳의 음식 문화에 대해 알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시 대학생 신분이라 매 끼니를 외식으로 해결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부담이 됐다. 그래서 도착한 다음 날에 장을 보러 마트에 갔는데, 각종 식료품, 고기, 생선 등 식량은 많지만 한국어로 이게 어떤 식재료인지 몰라 2차 멘붕에 빠졌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자취를 해본 경험이 없고, 매번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으면서 크다 보니 지구 반대편 스페인에 있는 나는 거의 굶어 죽을 지경이었다. 스페인에 도착하고 처음 며칠은 계란 후라이, 엄마가 싸준 김치, 라면으로만 연명하며 지냈다. 영양이 부족한 것 같다고 생각이 들 때는 한국인들도 많이 아는 스페인 대표 음식 "빠에야(Paella)"를 종종 사 먹으면서 단백질 보충을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스페인에 오기 전에 쓸모도 없는 스페인어 문법이나 회화 표현 대신, 식재료나 음식 단어나 잔뜩 외워 올걸.. 이라며 약간의 후회를 했다. 하지만 먹는 것에 진심인 나는, 마냥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그날부터 멋지게 음식을 주문하기 위해 스페인어를 열심히 공부했고, 각종 채소, 생선, 고기 부위 등을 부지런히 암기했다. 종종 어학원 친구들과 금요일 저녁에 타파스 투어를 하고 온 날에는 오늘 먹은 음식을 메모해 가며 나름의 스페인 생활력을 키워나갔다.
그러고 나서 10년 뒤, 나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주재원 근무를 하며 스페인 음식을 마음껏 체험해보고 있다. 나에게 '음식'과 '축구'로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던 스페인으로 돌아와, 다시 맛있는 현지 음식을 체험하고 공부하는 것이 즐겁다. 그러다 보니 '스페인에서 그날 분위기에 맞게, 적재적소에서, 알맞은 음식을, 맛있게 잘 먹는 법'에 대해 약간의 도가 텄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주변에 스페인으로 여행 오는 가족, 친구, 지인 등에게 스페인 음식에 대해 말로 설명해 주던 것을 정리해서 글로 엮다 보니 한 편의 브런치 북이 완성되었다.
흔히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가장 잘 적용되는 곳은 미술관이라고 한다. 미술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미술관에 소장된 보배와 같은 작품을 그냥 지나칠 수 있고, 의미와 감동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음식도 똑같다고 생각한다. '맛있게 먹는다는 것'은 단순 영양 섭취 이상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특히 해외여행 중 맛있는 음식을 잘 알고 먹는 경험은 여행의 질을 좌우한다. 음식에 담긴 이야기, 역사, 재료를 알고 먹으면 더욱 맛있기 마련이다. 낯선 도시에서 인터넷으로 찾은 생전 처음 가보는 맛집에 들어가, 여러 사진과 리뷰를 보면서 고민 끝에 주문한 메뉴가 입맛에 꼭 맞았을 때의 기억은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단순히 '맛있게 먹는다'는 행위 자체가 우리들에게 평생 추억이 되기도 한다. 내가 스페인 음식에 대한 주제로 브런치 북을 발행한 이유도 스페인 여행자들이 지구별 대표 미식 국가 스페인에서 '맛있는 음식을 잘 알고 먹는다는 것의 즐거움'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려주고 싶어서이다.
지난 2개월 동안 매주 2회씩 스페인 음식의 맛과 숨겨진 이야기, 다양한 매력을 소개하는 과정은 즐거웠다. 그리고 가끔 내가 올리는 사진을 보면서 갑자기 배가 고파져 집에서 뛰쳐나가 그 음식을 먹고 온 적도 있다. 글을 쓰면서 어려웠던 점은 스페인의 수많은 맛있는 요리들 중에서 어떤 음식을 골라서 쓰느냐였다. 브런치북 제목인 '님아, 그 빠에야를 시키지 마오'에서 드러나듯,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페인 음식에 대한 글은 최소화하고, 상대적으로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음식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려고 했다. 이 브런치 북을 읽은 독자들은 스페인 여행 중 절대 음식을 대충 '때운다'는 식으로 먹지 않기를 바란다. 자, 이제 본식으로 배를 채웠으면 이제 커피, 케이크, 초콜릿 등 디저트를 먹어야 할 차례이다.
<님아, 그 츄러스를 시키지 마오(가제)> 연재 발행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