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땅

코타키나발루 가야섬

by 호림

“내가 숲 속으로 들어간 이유는 깨어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였다. 삶의 본질적인 사실만을 직면하고 그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을지 알아보고, 내가 숨을 거둘 때 깨어 있는 삶을 살지 않았다고 후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삶이 아닌 삶은 살고 싶지 않았다. 삶은 정말로 소중하다. 그리고 가능한 한 체념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었다.” (윌리엄 데이비드 소로 <월든> 中)


스마트폰이 터지지 않는다.

‘와이파이가 잘 터지지 않는 건 불편해요’라는 투숙 후기가 의외로 마음속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때 스마트폰에서 '탈출, 해방, 도주' 같은 게 하고 싶었다고 고백해야겠다. 그렇게 향한 곳이 말레이시아 코타 키나발루에서 배로 30분 거리의 가야 섬이다. 한겨울에 비행기에 몸을 실었는데, 코타 키나발루 공항 밖을 나서니 무더운 기운이 몸의 곳곳으로 스민다. 제셀톤 부두까지 택시에 몸을 실었다. 분가라야 리조트로 가는 보트를 타고 30여 분 달려서 드디어 당도했다. 초록빛이 감도는 옥빛의 바다에 떠 있는 제티(Jetty : 둑, 부두)로 옮겨가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했다. ‘바람의 땅’이라는 이름 그대로 몬순 시즌의 성난 바다는 쉽사리 숙소로 입성을 시켜주지 않을 태세였다. 점점 더 파도를 세차게 치밀었다. 보트가 파도를 타고 제티에 가장 가까워지는 순간, 까무잡잡한 직원이 손을 내민다. 힘껏 손을 내밀어 배가 파도에 밀려나기 전 아슬아슬하게 탈출을 감행했다. 발이 안전하게 땅에 닿는 순간, 모험 아닌 모험의 순간에 세포가 짜릿하다. 이곳에서야말로 은둔할 자유를 얻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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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는 말레이시아의 국화인 진분홍빛 히비스커스가 제티부터 지천으로 피어 있고, 떠날 때도 그 자리에서 배웅했다. 청정 자연을 자랑하는 이곳의 원시림은 세계 3대 선셋으로 잘 알려진 코타 키나발루의 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속살이다. 바다에 면해있지만, 해발 4,095미터인 키나발루 산과 연결되어 있어 희귀 동식물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로 발을 들인 것이다. '키나발루'는 원주민 카다잔(Kadazan)족의 언어로 ‘영혼이 머무는 곳’이라는 뜻에서 비롯되었다. 말레이시아 사람들이 ‘죽은 자의 안식처’로 숭배하는 곳이다. ‘지상낙원이 있다면 이곳일까.’ 숙소 사이트 후기에는 ‘지상낙원’이란 비유들이 유독 눈에 띄었다. 분명한 것은 백색소음 대신 새가 지저귀고 파도소리의 높낮은 소음이 들리고, 싱그러운 녹음이 우거진 이곳에서 얻는 은둔의 기쁨은 부인하지 못하겠다. 분가라야 리조트가 있는 가야 섬은 그 이름때문인지 삼국시대 가야를 떠올리게 하지만 바자우 족의 언어로 ‘크다’라는 뜻을 가진 섬이다. 가야 섬은 사피 섬, 마무틱 섬, 술록 섬 등 5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툰구 압둘 라만 해양공원 섬들 중 가장 큰 섬이다. 비취색 바다가 보이는 풀빌라에 묵으며, 하루 종일 하는 일이라곤 아침에 짹짹 지저귀는 새 소리를 듣고 밤에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파도의 소리를 듣는 일이었다. 개인풀의 잔잔한 물소리를 들으며 널찍한 선베드에 누워 바다 전망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전날까지만 해도 업무로 짓눌려 있던 게 믿어지지 않는다. 자연 그대로의 야생화의 짙은 분홍빛깔, 넘치는 생명력을 주체하지 못하고 끝을 모르고 뻗은 활엽수의 짙은 녹색과 어우러진 맑은 바다의 모습은 탄성을 자아냈다. 심신의 피로가 넘실대는 파도소리에 죄 쓸려간다. 책 한 권 들고 야자수 숲 그물침대(해먹) 위에 누워 취하는 짧은 휴식은 ‘바로 이곳이야’라고 내 몸에 항변하며 일말의 긴장감도 내려놓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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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왕도마뱀

느릿느릿, 육중한 몸을 겨우 가누듯이 움직이는 도마뱀을 보고 뒷걸음을 쳤다. '말레이왕도마뱀(Water Monitor)' 때문이다. 다른 말로 '물왕도마뱀'이라고도 한다. 몸 길이가 최대 3미터에 달하는 악어, 아니 도마뱀이다. 몸집만 봐도 '왕'이라는 이름이 붙을 만하다. 말레이시아 가야 섬은 야생 멧돼지, 거대한 왕도마뱀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말레이왕도마뱀은 현존하는 마지막 드래곤이라는 코모도 드래곤을 연상시킨다. 그도 그럴 것이 코모도 드래곤 다음으로 큰 몸집을 자랑하는 녀석이다. 꼬리를 스렁스렁 끌며 다니는 모습에 가까스로 놀란 마음을 추스른다. 강한 비늘로 싸인 꼬리를 내리깔고 돌아다니고 모습을 보며, 왕도마뱀을 만날 수 있단 걸 알았으면서도 발길이 주춤거렸다. 연못에도 물길을 크게 가르며 다녔고, 수풀도 왕왕 다녔다. 이름에 걸맞게 물을 매우 좋아한다.


코모도 드래곤과 비슷해서 한마디로 '살아있는 공룡'을 만난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곳이 쥐라기공원이란 건 아니지만, '공룡'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우리의 유년기는 요동친다. 고백하건대, 코모도 드래곤에 대해 늘어놓는 있는 이유는 말레이시아에서 본 말레이왕도마뱀을 코모도 드래곤으로 착각했던 데서 기인한다. 그러니까, 여행은 또 다른 여행을 유도하기도 한다. 말레이왕도마뱀을 코모도 드래곤으로 착각한 걸 알고 나니, 코모도 드래곤을 보고 싶단 욕심에 또 다른 여행 채비를 재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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