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방콕 카오산로드
악몽을 꾸었다.
요즘따라 식은땀이 날 정도로 악몽에 시달리곤 했다. 밤마다 두세 번씩 이어지는 악몽. 참다 못해 작은 종과 하얀색 깃털이 달린 드림캐처(Dream Catcher)를 주문해서 베란다에 걸어두었다. 이따금 이른 아침에 조그마한 무지개가 드리워져 어디서 무지개가 생기는 것일까 생각해봤는데, 집이 동향이라서 아침에 베란다로 뻗어들어오는 햇빛이 드림캐처에 반사되어 생기는 것이다. 무지개를 보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깃털 장난감을 좇는 고양이처럼 바라보게 된다. 나쁜 꿈은 모두 다 거미줄 모양 그물로 걸러내어 버리면 좋으련만.
드림캐처의 모양은 납작하게 생긴 둥근 모양에 거미줄 모양으로 얽히고설켜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악몽을 막아주는 용도다. 방콕 카오산로드에서 드림캐처를 팔고 있는 잡화상을 기웃거리며 구경하긴 했지만, 악몽을 꾼 후에야 총알배송으로 사게 됐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토속품인 드림캐처. 어떻게 태국까지 굴러들어왔는지 모르지만, '세계 배낭여행자들의 성지'인 카오산로드에서 동양과 서양의 문물이 교차한다고 이상할 것도 없다.
우리는 견디기 버거운 경험을 달리 비유할 말이 없을 때 '악몽 같았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악몽에 대처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꿈만이 아니라, 인생에도 드림캐처가 필요하다. 인생의 드림캐처는 사람마다 제각각의 모양일 것이다. 인생의 드림캐처는 누가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수작업'을 해야 한다. 삶이 틀어지거나 망가지면 다시 일어설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드림캐처가 망가졌다고 슬퍼할 사람 없듯이, 망가진대로 새로운 인생의 드림캐처를 만들면 된다. 더 탄탄하고 완성도 높은 삶이 만들어지는 숙명적인 과정일 뿐이다.
가난은 악몽같았다.
가난으로 휴학계를 내고, 고시원으로 이사를 했고, 과외 아르바이트, 서빙 아르바이트, 불판 닦는 고깃집 아르바이트 등 세 가지 일을 병행하기도 했다. 세 가지 일을 해도 휴학생 신분에 생활비 용도로 엄마에게 돈을 붙이고 나면 한달에 손에 쥐는 돈은 푼돈이었다. 세 가지 일을 해도 돈이 궁해서 친구에게 연락하면 얄팍한 인간관계를 확인하게 될 뿐이었다. 한번은 음식점에서 일하기 위한 발급비용 몇 천원이 똑 떨어져서, 단골 슈퍼에서 돈을 빌려 겨우 보건소에 간 날이 있었다. 도수 높은 안경을 쓴 키 큰 고시원 총무는 못마땅해 했다. 고시원비를 을밋을밋 미뤄 자신의 잡무를 늘리는 게 못마땅했을 것이다. 하루종일 처박혀 고시원생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으니 불만이었을 것이다. 그날도 두 달째 미룬 고시원비가 문제가 됐다. 두꺼운 안경을 쓴 짧은 머리 총무는 말끝에 "거지 같은 게"라는 말을 했고, 나는 "지금 뭐라고 말했냐"고 쏘아붙였다. 그 말이 그녀의 화를 돋궜는지, 도수 높은 안경 뒤로 살기가 번득였다. 화장실에 다녀오는 사이 경찰을 불렀다. 총무는 씩씩 거리고 있었다. 시험에 합격만 하면 공무원이 될 자신을 감히 기다리게 만든 걸 모욕이라고 느낀 것 같았다. 두꺼운 안경의 총무는 귀찮은 벌레를 잡듯 양손으로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조금 전의 살기어린 눈이었다. 그래, 이 눈빛 때문에 경찰을 부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경찰이 도착했고, 내 얼굴의 상처와 목의 상흔을 살폈다. 다크서클이 있는 한 경찰이 하품을 한번 했다. 두 명의 경찰은 '쌍방과실이네요'라며 서로 사과하라고 말했다. 경찰은 하품을 한번 더 했다. 고시원 총무는 나-정확히는 자신을 불리하게 만들 내 얼굴의 상처와 목의 상처-를 보더니 눈을 내리깔고 "죄송하다"고 했다. 경찰은 이번엔 나에게 사과를 하라고 고갯짓을 했다. 나는 사과할 이유가 없다고 대답했다.
때로 우리 인생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과실을 따지는 게 모호해지는 지점이 있다. 그런 애매한 상황을 위해 '쌍방과실'이라는 편리한 잣대가 들이민다. 예를 들어 성추행 피해자는 짧은 치마를 입은 게 쌍방과실이고, 왕따 피해자는 병맛인 게 쌍방과실이고, 나같은 경우는 고시원비를 미룰 정도로 가난했던 게 쌍방과실이 된다. 나는 이 일이 있은 후 목이 뻐근했는데, 누가 목을 졸라서 그런 게 아니라, 하품하던 두 명의 경찰이 잘 볼 수 있게 목을 너무 젖힌 탓이었다. 경찰은 "사과받았으니 됐죠?"하더니 자리를 떠났었다. 작디작은 공간에 돌아와 TV를 틀어놓고, 그제야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온몸이 떨렸다. 목이 졸려서? 아니, 일을 아무리 해도 고시원비도 제때 내지 못하는 가난에 숨통이 조여서, 경찰의 하품에 놀라고,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총무의 불의가 두렵고, 삶이 무서워져서 사시나무처럼 떨며 작디작은 공간에서 울었다. 스물네 살이었다.
다음 날 아침에 교대한 다른 총무가 와서 말썽을 일으키고 싶지 않기 때문인지, 죄송하다며 후시딘을 내밀고 사라졌다. 엄마에게 전화가 왔고, 밥을 먹었냐고 물었다. 후시딘을 얼굴에 바르며, 밥 먹으러 나갈 거라고 간단히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몇 달 뒤 고시원을 떠나 원룸으로 이사를 갔고, 복학을 했다. 여전히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했고, 엄마 통장으로 돈도 매달 잘 부쳤다.
친구와 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있는데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우리딸, 사랑한다"라고 건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사랑한다"고 말했다. 옆에서 친구는 "아빠랑 그런 말도 해? 나는 상상도 안된다"라며 신기해했다. 1년 전까지 거지같아서 목이 졸렸고, 얼굴이 찢어졌고, 휴학하고 세 가지 일을 병행해야 했지만, 온몸으로 울음을 삼켜야 했지만, 아빠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어쩌면 내가 목이 졸리던 시기에, 아빠는 암 수술이 잘 되면 살아 있는 동안 사랑한다고 자주 표현해줘야지, 하며 죽음과 맞서싸우며 다짐했을지 모른다. 아빠는 퇴원하고 언젠가부터 부쩍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 말은 묵직한 서체의 캘리그래피 같았다. 결혼식에서 아빠가 깡마른 허수하비처럼 헐렁하게 예복을 입고 내 손을 잡고 식장으로 걸어들어갔다. "사랑하는 내 딸아"라며 깡마른 목소리로 축문을 읽기 시작할 때 나와 내 동생이 얼마나 울었는지 기억한다. 사람들은 "신부가 너무 운다"고 걱정들을 했고, 나는 그 말에 울다가 웃었던 거 같다.
드림캐처에 달린 종이 바람에 딸랑거렸다. 잦은 악몽의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헤어날 수 있으리라 믿고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는 방법밖에 달리 없었다. 어쨌든 드림캐처를 걸고 난 이후부터 신기하게 점차 악몽을 꾸는 횟수가 줄어들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