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
2005년 겨울, 엄마는 유럽 여행을 온 친구를 만나러 기차를 타고 런던으로 갈 예정이었어.
유럽 대륙 안에서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어. 스위스에서 발급받은 학생 비자가 있었고, 적법한 절차를 거쳐 파리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어.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 이것이 문제였지.
엄마는 영국에서 머무를 게스트 하우스 주소를 제대로 모른다는 이유로 입국 심사가 한없이 지연되기 시작했어. 런던에서 4일이나 머물 숙소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모른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거였지. 이건 엄마의 실수였어. 대륙 내에서 이동할 때처럼 '여권 사진 한번 스윽 보고' 끝날 줄 알고, 예약을 해둔 한인 게스트 하우스의 주소와 연락처를 적어오지 않았던 거야.
출입국 심사는 한없이 늘어지기 시작했고 엄마의 출입국 심사를 담당한 직원은 영국 입국과는 상관없는 질문을 늘어놓기 시작했고 급기야 '너 영국 여행할 돈은 있니? 지갑에 얼마 있어? 지갑 열어봐. 가방에는 뭐가 들었니? 가방 열어봐.' 이런 식으로 번지기 시작했어. 프랑스 사람들이 '여권 사진 한번 스윽 보여주고' 지나칠 동안 엄마는 들고 있는 짐가방을 열어 엄마의 속옷까지 탈탈 털어 보여줘야 했고, (사실 이렇게 해봐야 엄마에게 도움이 안 되는 행동이었는데) 출입국 담당 직원에게 뭐하는 짓이냐고 화를 냈어. 결국 그 직원과 엄마는 언성을 높이며 싸웠고, 그는 엄마 여권을 들고 기다리라는 말만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어.
원래 탑승하려던 기차는 이미 떠났고, 엄마는 그 직원이 다시 나타날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단다. 그 와중에 다른 직원이 나타나서는 저쪽에 영어를 한마디도 못 알아듣는 한국인 아주머니가 있는데 통역을 해달라고 하더라. 참나.. 나도 여권을 뺏긴 마당에 통역을 해줬지. 결국 그 아주머니가 나보다 먼저 영국으로 가는 기차를 탔어. 우여곡절 끝에 엄마는 이미 런던에 도착했어야 할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기차를 탔고, 영문을 모르는 친구는 반나절 이상을 런던 기차역에서 엄마를 기다려야 했어. 그렇게 진을 빼고 나서야 런던 여행이 시작되었어.
2021년에 떠올려 보는 2005년의 런던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기절초풍하게 비싼 환율과 어두움이야. 파리에서 유로화를 쓰다 만난 파운드화는 여행 내내 도무지 적응할 수 없는 환율이었어. 오후 3시만 돼도 저녁 7시처럼 어두워졌거든. 부슬비가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하며 항상 촉촉하게 젖어 있던 하이드 파크의 산책길도 기억 나. 미대를 다니던 친구 덕분에 즐겁게 관람했던 대영 박물관과 예산 부족으로 엄청난 시야 방해를 감수하고 본 오페라의 유령 뮤지컬. 뮤지컬을 본 후 숙소로 돌아가던 길에 봤던 빅벤과 런던아이, 그리고 타워브리지의 야경. 수도 없이 보았지만 볼 때마다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던 빨간색 이층 버스. 생각보다 맛있어서 머무는 동안 여러 번 먹었던 피시 앤 칩스와 China town에 있던 기가 막혔던 중국 음식점. 숙소로 돌아가다 아쉬움에 들린 이름 모를 펍에서 흑맥주를 마시며 봤던 축구 경기, 그 경기를 보며 광분하던 옆 테이블의 영국 청년들. 그 시절 런던 여행 코스에서 빠지지 않았던 마담 투소 박물관, 그리고 가슴이 웅장해지던 영화 노팅힐과 해리포터 촬영지까지.
여행의 시작은 예상치 못한 암초를 만나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 했지만, 짧은 4일 동안 런던은 엄마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었단다. 10점 만점에 9와 4분의 3점 정도 좋았던 것 같아. 어린 시절부터 매체를 통해 보았던 런던의 볼거리들은 내가 간접 경험을 통해 본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고, 지금도 큰 변화 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을 거야. 그리고 엄마는 너와 다시 그곳에 가서 보고, 먹고, 마시고 즐기겠지. 너의 눈에 비칠 런던의 모습이 어떨지 궁금해. 너와 갈 때는 해가 조금 더 길어지는 여름에 가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그리고 그때는 런던에만 머무르지 않을 거야. 영국에는 런던만큼 매력적인 도시들이 아주 많거든. 좀 더 시간을 두고 천천히 영국의 이곳저곳을 함께 다니고 싶어.
아마 너와 함께라면 10점 만점에 20점만큼 좋을 수도 있을 거야.
2021. 12. 03
너와 가보고 싶은 곳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