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분이 오셨다

사랑에도 굴곡이 있다

by 일상채색가 다림

오셨군요. 오랜만이네요.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은 아니지만, 죽지도 않고 잊혀질만 하면 오시는 분. 요즘 좀 살만하다 싶어서 마음을 놓는 순간 오시는 그 분. 저만 오는 것은 아니겠지요. 호환마마보다 더 무섭다는 바로 그 분!


육아 비수기님이 오셨습니다


아무리 오은영, 신의진 교수님 급 엄마래도 24시간, 365일 내내 아이가 같은 레벨로 사랑스럽지는 않습니다. 미친 듯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하루하루 커가는 게 아쉬운 시기가 있는 반면, 내 배로 낳은 놈 이제 너무 커져서 다시 넣을 수도 없고(늘어진 뱃살을 보면 넣을 수 있을 거 같기도 한데) 차라리 빨리 커버려서 엄마는 안중에도 없는 나이가 되어 서로 남처럼 살았으면 좋겠다 싶은 날도 있지요.


전 전자의 시기를 육아 성수기, 후자를 육아 비수기라고 부릅니다.


회사 생활도 그렇고, 남녀 간의 연애도 그렇잖아요. 유난히 뭐든 잘 풀리고 다 좋고, 이해되는 시절이 있는 반면, 뭘 해도 안되고 미워 죽겠고, 살기 싫고.. 그런 시절도 있고. 좋고 나쁨의 그래프가 반복되지요. 제가 수험생 시절보다 열심히 밑줄 치며 읽었던 육아서적 중 하은맘 김선미 님의 '닥치고 군대 육아'라는 책에 보면 "하은맘 육아는 봄/가을 육아"라는 말이 나옵니다. 저의 성수기 & 비수기 이론(?)과 비슷한 논리입니다.


나 자신이 너무 자애롭고 너그러워서 오금이 저려 막. 애가 뭔 짓을 해도 받아들여지고 이해되고 용서가 돼. 뭐든 허용해줘. 근데 곰곰이 따져보니 그런 날은 주로 '봄, 가을'(성수기)이었더라. 그렇게 깨방정을 떨던 봄/가을과는 달리 더워도 지랄하고 추워도 지랄하는 온/습도 초민감 김여사에게 여름 육아(비수기)는 완전 죽음이었어. 겨울엔 춥다고 나가질 못하니 뭐 여름이나 매한가지.

도대체 그럼 언제 애 예뻐하느냐구? 온도 적당한 봄, 가을이어야 하구, 명절 비켜가고 생리 기간 아니어야 하구, 남편은 월급이 좀 올라서 사이좋고 잠 푹 자고 일어나 육아서 좀 읽은 어떤 날. 그런 날 배려 육아하는 거야. 그런 날은 애 사랑 통장에 저축 이빠~이 하는 기분으로 쪽쪽 빨고 여름, 겨울에 통장 잔고 다 빼먹는 거야.

엄마도 사람인데 어떻게 1년 365일 잘하니? 그게 사람이야? 나의 취약함과 부족함을 완벽하게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게 육아의 시작이야. 완벽한 엄마를 내려놔야 해. 안 그럼 애도 죽고 나도 죽어.

- '닥치고 군대 육아', 김선미 저


저의 가장 큰 문제는 제 스스로를 오은영 박사급으로 너무 높이 평가한 것이었습니다. 나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굉장히 높았고, 육아를 우습게 봤지요. 당연히 얼마 안 가 그 기대는 와르르 무너졌고 내가 얼마나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인지를 알게 되었지요. 엄마의 사랑에도 일종의 그래프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 아이에 대한 저의 인내심과 배려가 하한가를 칠 때마다 이제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아, 비수기 시즌이 시작되었구나'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게 되었습니다.


비수기 증상이 뭔가요?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저의 경우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아이고 두야병: 편두통이 찾아옵니다. 전 편두통이 심해지면 구토 증상까지 오기 때문에 편두통이 찾아오는 즉시 진통제를 투여해야 합니다. 비수기엔 이지엔과 한 몸!

2) 나 잔 거 맞아?병: 자도 자도 피로가 안 풀립니다. 저는 주로 비수기의 시작이 아이의 잠투정과 시작되기 때문에 엄마인 저도 잠을 제대로 못 잡니다. 당연히 피곤이 축적되지요.

3) 또 배고파병: 피로한 몸으로 어쨌든 오늘 하루도 육아를 해야 하니까 나도 모르게 음식을 찾습니다. 분명 배는 고프지 않은데 입은 심심한. 이것은 매우 위험 신호!

4) 나 다시 돌아갈래병: 보잘것없는 애엄마가 되어 매일같이 반복되는 아이와의 뻘짓에 현타가 오면서 부질없는 나 임신 전으로 돌아갈래 혹은 나 결혼 전으로 돌아갈래병이 시작됩니다. 이때로 돌아간다면.. 저때로 돌아간다면.. 이런 선택은 안 했을 거야!라고 비장하게 외쳐보지만, 현실은 변한 것이 없습니다. 부질없고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감정 소비 행위.


약은 없나요?


그럼요. 육아 비수기를 벗어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이건 개인차가 조금씩 있으므로 스스로에게 가장 잘 맞는 처방전을 찾아내야 합니다. 저만의 처방전을 몇 가지 공유합니다.


1) 좋은 날씨: 이건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나 동시에 아주 큰 부분 차지하는 좋은 약입니다. 적당히 선선하고 하늘도 아름답고 알아서 적당한 시간에 어둑어둑해지는 딱 요즘 같은 가을 날씨. 비수기를 벗어나는 최고의 처방전 중 하나죠. 너도나도 살아있음을 느끼는 봄도 물론 좋구요.

2) 집 나가기: 좋은 날씨에 나가면 금상첨화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침에 눈을 떴는데 격한 비수기라는 확신이 든다면, 무조건 밖으로 나갑니다. 나가야 해요. 집은 우리의 안식처이기도 하지만 일터이기도 하기 때문에 Refresh가 필요합니다. 물론 저처럼 영유아를 보육 중이라면 한계가 있지만, 매일 가는 놀이터라도 일단 나가는 게 집에 있을 때 보단 애한테 덜 지랄합니다.

3) 나가서 책 읽기: 나만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모든 엄마들은 자기만의 시간이 아주 소중하고 귀하잖아요. 전 주로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나가서 책을 봅니다. 2-3시간 정도 내가 듣고 싶은 음악 실컷 들으면서 책을 보고 나면 멘탈이 충전되는 느낌이 듭니다. 대신 책 보다 말고 핸드폰으로 육아 정보 검색 금지! 남편한테 애기 뭐하냐 물어보기 금지!

4) 단독 호캉스: 이건 제가 다른 글에서 이미 자세히 쓴 적이 있습니다. 전 1박 2일 동안 온전히 저만의 고요한 시간을 가졌던 것이 너무 좋았고, 충전이 많이 되었어요. 비수기가 왔으니 조만간 또 가야겠군요.



힘내요, 엄마들이여!


비수기 시즌이 온 엄마들이여, 내가 왜 이럴까 하며 자책하거나 좌절하지 말자구요. 지금은 여즉 저축해둔 사랑 빼먹는 시기라고 생각합시다. 오늘 아침에 소리 지른 거, 등짝 때린 거, 째려본 거, 모진 말 쏟아낸 거 등등.. 마통 뚫리기 전에 어서 사과하고 스스로 처방전 찾아내서 잘 추스려서 성수기 때 바짝 사랑 저축하면 돼요.


힘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