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육아의 세계
2022년 3월, 아이가 드디어 기관 보육을 시작했다.
대단한 원칙을 가지고 시작한 가정 보육은 아니었다. 임산부 시절부터 쓸데없이 많은 양의 육아서를 읽으며 나는 여기저기 참 많이도 휘둘렸었다. 내 딴에는 아주 똘똘하게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엄마 4년 차인 지금 그 시절의 나를 돌아보면 그저 안쓰러울 따름이다. 육아라는 작업의 비 확실성. '다 좋다고 해도 내 새끼는 다름'주의, '다른 사람은 다 해도 나는 못함'주의를 미처 알지 못하고 범했던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다.
그 와중에 코로나가 우리의 삶을 덮쳤고 이사를 하며 나의 가정 보육은 3년으로 늘어났다. 정말 힘들고 지난했던 순간이 어찌어찌 지나고 아이와 나는 본격적인 공동육아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은 쉽게 말해 '부모가 어린이집 운영진이 되어 함께 아이들을 양육하며 어린이집을 꾸리는 곳'이라고 보면 된다. 더 간단하게 접근하자면 '한살림 조합원' 같은 거라고 봐도 될 것 같다. 일정의 조합비와 출자금을 지불하고 모든 아이들의 부모는 각자 어린이집 내에서 (일반 어린이집이라면 교사회나 나라에서 맡아서 하는 일들을) 분담한다. 아이들을 온종일 돌봐주시는 교사들이 따로 계시긴 하지만, 교사의 휴가나 교육으로 인한 부재 상황에서 부모들이 순번을 정해 일일 교사(일일 교육 아마라고 부름)로 투입된다.
부모의 입장에서 성가신 일이 많은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겨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는 사소하다. 코로나로 외출이 어려워진 탓에 온종일 실내에서만 생활하는 아이가 안타까웠고, 제한된 반경 내에서라도 최대한 밖에서 뛰어놀고 자연을 가깝게 느끼며 지낼 수 있는 곳을 찾아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아이가 아직 많이 어리던 시절 누군가 지나가듯 이야기 해준 '공동육아 어린이집'이 생각났던 것.
집에서 최대한 가까운 곳 서너 군데를 추려 입학 설명회를 참여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면담을 하고, 터전을 둘러보는 생애 첫 학부모 노릇을 6개월 가까이했다. 나름의 심사숙고를 거쳐 결정한 곳에 생각 외로 아이는 빠르게 적응해 주었다. 한 달 넘게 울고 불고 씨름을 할 것이라 예상한 나와는 달리, 아이는 2주 만에 생글생글 웃으며 담임교사를 향해 웃으며 달려간다. 낮잠 적응 후 full time 등원까지도 꽤나 험난한 여정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 또한 나의 착각이었다. 낮잠 첫날부터 아이는 본인의 최애 이불만 잘 쥐어주면 알아서 자는 아이가 되었다.
물론 모든 것을 다 알아서 잘하지는 않는다. 날이 갈수록 편식은 심해지고 있고(터전에서 고기반찬을 아예 안주는 것은 아니지만 식물성 단백질 위주의 식단이 제공됨), 공동체 생활과 친구들과 어울리는 법, 몸 다루는 법 등 아이가 배워야 할 것은 많다. 하지만 모든 것을 느긋하게 바라보는 교사회의 시선 덕분인지 조급하지 않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잘 안보일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고 있다. 아이는 조금씩 본인만의 속도로 삶을 익혀가는 중이다.
나 역시 공동육아 어린이집의 조합원으로서의 삶을 익히고 있다. 등원과 동시에 우후죽순 생겨난 각종 단톡방과 월별로 챙겨야 할 여러 가지 행사들 속에서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 파악 중이다. 아이와 단 둘이 수도승이 수련하듯 살아온 3년의 시간을 정리하고 다시 세상 밖으로 조금씩 나오고 있다.
오후 4시. 아이를 픽업하러 터전으로 간다. 자그마한 어린이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삼십여 명의 아이들이 한데 어울려 온 몸에 흙을 뒤집어쓰고 신나게 놀고 있다. 엄마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달려오는 아이의 손톱 밑이 시커멓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에게 달려와 오늘 뭘 하고 놀았는지 자랑하고, 아직 몸 쓰는 법을 배우는 동생들의 손을 잡고 기꺼이 뒷산에 올라가는 형님반 아이들이 사랑스럽다. 비록 마스크를 쓰고 있어야 하지만, 어린이집 대문 밖을 벗어날 수는 없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논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 하나하나가 너무 소중해서 눈에 담고 또 담는다.
뭐든지 다 주고 싶은 마음에 무엇을 주어야 할지 몰랐던 시간들이 지나고 지금 여기, 아이는 오늘도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쓰며 신나게 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