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로부터 온 편지

잘 늙고 싶습니다만

by 일상채색가 다림

"할머니! 이거 떨어트렸어요!"

"..... 내 거예요? 아이고, 내꺼 맞네. 고마워요."


아직 어색합니다. 누군가에게 할머니라 불리는 것이. 이제 인정해야겠지요. 길을 가던 청년에게 저는 영락없는 할머니의 모습인가 봅니다. 저도 서른 중후반까지는 참 똘똘했거든요. 이렇게 칠칠치 못하게 물건 흘리고 다니던 사람이 아닌데, 요즘 부쩍 실수가 늘었어요. 특히 이 놈의 핸드폰은 어딜 가나 자꾸 까먹어요. 아직도 저에게 걸려오는 전화가 있고,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 축복인지 박복인지 모르겠습니다.


청년이 챙겨 준 핸드폰이 다시 떨어지지 않게 가방에 잘 집어넣고 집으로 갑니다. 집이 시끌벅적한 것을 보니 학교 수업이 끝났나 봅니다. 마당에서 깔깔거리며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던 아이들이 제가 나타나니 저에게 달려와 인사를 합니다. 저희 집이자 제가 운영하는 쉼터에서 함께한 지 일 년 정도 된 아이들이에요. 처음에 왔을 때는 저랑 눈도 안 마주치려고 하던 아이들인데요. 아이들은 상처도 쉽게 받지만, 조금만 부드럽게 만져 주어도 저렇게 살아납니다. 애는 키우는 재미가 있지요.


마당 한편에 의자 펴놓고 애들하고 노닥거리고 싶은데, 몽골에서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할 일이 태산입니다. 작년까지는 매년 두 번씩 가족들을 데리고 단기 선교를 다녀왔는데, 올해부터는 한 번만 가기로 했어요. 체력적으로 두 번은 저희 부부에게 조금 벅차기도 하고, 쉼터 업무를 다른 동생들과 나눌 예정이라 한국에서 해야 할 일들이 많아요.


이 쉼터는 저의 오랜 꿈이었어요. 여러 가지 이유로 갈 곳도, 기대 쉴 곳도 없는 여성들과 아이들을 위해 잠시라도 몸을 누이고 마음을 위로받을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고맙게도 가족들이 저의 꿈을 지지해 주었고, 저와 같은 곳을 바라보는 수많은 사람들이 저를 도와주었어요. 제가 얼굴 마담 노릇을 하곤 있지만, 그들의 손길이 아니었다면 이곳은 생기지 못했을 거예요. 말 그대로 기적의 집이랍니다. 갈수록 쉼터에서 해야 할 일이 많아져 살던 집을 처분하고 이곳에 거주 중인 사람들과 한 지붕 생활을 하는 것이 불편할 수도 있을 텐데 남편은 군말 없이 저를 따라왔고, 아이도 수시로 쉼터에 와서 일을 돕고 저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습니다.


"엄마, 이제 그냥 좀 쉬어. 책을 또 써?"

"이놈아, 쉼터 운영비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줄 아냐? 엄마가 쉬는 거 보고 싶으면 네가 기부 좀 해!"

"나는 매주 와서 재능 기부하고 있잖아. 내가 애들하고 얼마나 재밌게 놀아주는데!"


제가 몽골에서 돌아오자마자 또 책을 쓰기로 했다 하니, 아들놈이 한마디 거듭니다. 책을 이미 몇 권을 썼는데 또 쓸 이야기가 있냐며 투덜거리네요. 내가 지보고 써달라는 것도 아닌데 왜 저러나 몰라요. 타자칠 힘이 남아 있는 한 계속 쓸 겁니다. 글을 쓰는 게 물론 좋지만, 돈도 필요하거든요. 책 몇 권 팔아서 큰돈 만지는 건 아니지만, 책 나오고 서점 순례하며 독자분들 만나고 강연도 다니고 하면 확실히 기부금을 많이 보내주세요. 아직 제가 나이치고 얼굴이 반반해요. 홍보담당 할 정도의 미모와 체력은 있어요.


할 일이 또 있어요. 다음 주 주말에는 마당에서 축제가 열려요. 제가 젊었을 때부터 몸 담고 있는 공동체에서 알게 된 언니드...ㄹ....이제 할머니...들인데 하여간 매년 두 번 엄청 큰 페스티벌을 해요. 이번 가을 페스티벌에 오랜만에 저희 마당을 빌려줬어요. 수익금 일부도 쉼터에 기부되고요.


삶의 바닥을 치고 지하까지 들어가 아슬아슬하게 버티다 쉼터를 만나 얼굴과 마음에 뽀얗게 살이 오르는 여성들을 보고 있으면 기적이라는 거, 별거 아니구나 싶어요. 밥 한 끼, 커피 한 잔 마실 돈 서로 모았을 뿐인데 사람 하나를 살릴 수 있다니.. 해보기 전에는 몰라요. 그 즐거움을. 그리고 한번 해보면 끊을 수 없어요. 중독성이 캡짱이에요. 아, 요즘 젊은 친구들은 이런 말 안 써서 무슨 말인지 모르죠. 있었어요 저런 단어가.


이제 저는 일하러 가봐야겠어요. 내가 이 나이에도 벌려 놓은 게 많아가지고 쉬지를 못한다고 매일 투덜거리지만 무진장 행복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고 허무하게 죽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살았는데, 아무것도 안 하기는커녕 이 나이에도 바쁠 수 있어 행복해요. 제 안에 숨 쉬던 뜨거운 불꽃이 아직 사그라들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삽니다.


서로의 흉터에 후시딘 발라주며 함께 성장하며 살아가는 삶. 꽤 괜찮아요.


궁금해요? 같이 하고 싶어요? 말만 하지 말고 놀러 와요, 우리 집에.

찐하게 커피 한 잔 타 줄 테니까.






지난 금요일, 언니 공동체에서 진행 중인 10월 글 쓰는 언니 미션이 '할머니가 된 나의 모습'에 대한 글을 쓰는 거였다. 외국에 나가 살고 있을 거라는 언니, 바닷가 앞 주택에서 살고 있을 거라는 언니, 동화 쓰는 언니, 레깅스 입고 젊은 동생들과 섞여 요가하는 언니 등등.. 언니들의 꿈은 하나같이 눈이 부셨다.


나는 할머니(할머니라 불리는 연령이 몇 살로 상향 조정되었을까? 쓸데없이 평균 수명이 너무 늘어나지 않기를)가 되어 뭘 하며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를 상상해보았다.


'책도 내고, 일 년에 한두 번 단기 선교를 가고, 힘든 상황에 있는 여성과 아이들을 위한 쉼터를 운영하는 삶'에 대해 간단하게 써보는데, 쓰는 내내 너무 행복했다. 내가 가고 싶은 그곳, 내가 중요시하는 THE 가치. 그것이 녹아들어 있는 나의 할머니 시즌. 짧은 댓글로만 남기기가 아쉬워 브런치로 옮겨와 확장판을 그려보았다. 간만에 글 쓰며 너무 행복했다 :)


언니공동체가 뭐냐고? 궁금해요?

드루와요 그럼. 아주 좋아 짜릿해.

https://cafe.naver.com/powerfulsisterhood







매거진의 이전글더 이상 겨땀이 두렵지 않은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