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눈부신 친구
아주 오랜만에 손에서 뗄수 없는 소설을 만났다. 아무리 술을 마시고 늦게 귀가한 밤에도 몇페이지라도 읽고 잠자리에 들게 만들었던 책.
소설은 지역색이 강한 나폴리를 배경으로 릴라와 레누라는 두 주인공을 통해 1950년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 근대사 소용돌이 속에 60년에 걸친 이들의 관계를 녹여낸다. 이야기는 쉴 새 없이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관통하지만 이런 시대적 상황들이 인물을 압도하도록 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선봉장이 되어 세상을 바꾸지도 않고 변화에 무지한채 개인의 삶을 살아가지도 않는다. 이들의 삶과 우정, 사랑이 시대와 함께 복잡하게 얽히고 설키는 가운데 인간의 감정을 섬세하면서도 강렬하게 그려 낼 뿐이다.
멀게만 느껴 지는 지구 반대편 이탈리아 작은 도시 나폴리의 이야기이지만 학생 시위, 공산주의, 노동운동 등 우리의 근현대사와도 많이 닮아있다. 식민지와 전쟁, 독재와 눈부신 경제 성장기를 지낸 나의 조부모님과 부모님이 살았을 한국을 상상했다. 수많은 이데올로기와 가치의 충돌 속에 개개인이 했을 선택이 쌓여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과 그 성장 배경을 만들어 냈겠지.
여섯 살 꼬마에서 60대 노인이 되어도 릴라와 레누의 관계는 뜨겁고 복잡하며 맹렬하다. 평생의 라이벌로 서로를 자극해 가며 질투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용서한다. 가족이나 친구, 연인 혹은 동료에게 느낄 수 있는 인간의 모순적이지만 보편적인 감정들을 함께 느끼며 나는 릴라가 되었다가 레누가 되었다가 했다. 우리는 언제가 한번쯤 누군가에게 릴라였고 레누였을것이다. 두 사람과 함께 하는 동안 나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 곁에 있거나 있었던 수많은 친구들을 떠올렸다. 학업으로, 연애와 결혼으로, 사회생활을 하며 가까워 졌다 멀어 졌다 하는 모든 인간 관계는 앞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굴레겠지.
각500페이지가 넘는 4권의 책이지만 이야기는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결말 역시 ‘두 친구는 그 동안의 갈등을 해소하고 행복한 노년 생활을 이어갔다’는 해피엔딩이 아니다. 어린 시절 골목 어귀에서 잃어버린 인형이 반세기를 지나 레누에게 돌아왔듯 두 사람의 우정도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 고향 나폴리, 소설의 출발점으로 돌아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