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나타내는 오방색
어릴 적, 할머니 장롱에는 늘 복주머니가 걸려 있었다.
빨강, 파랑, 노랑, 흰색, 검정—곱게 이어진 다섯 가지 줄무늬가 복주머니를 장식하고 있었다.
그 복주머니는 내가 돌잔치 때 받았던 소중한 선물이라고 했다. 손끝으로 천을 스치면 부드럽게 감기고, 눈은 자연스레 그 오방색 줄무늬를 따라 움직였다. 그때 나는 그저 ‘예쁜 복주머니’라고만 생각했지만, 할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건 그냥 색이 아니야. 다 뜻이 있는 거란다.”
그때는 몰랐다.
그 색들이 가진 뜻을. 그러다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할머니가 더 이상 곁에 계시지 않을 때였다.
오방색이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자연과 계절, 그리고 삶의 원리를 품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내 기억 속 오방색은 한국을 떠나 먼 곳에서 볼 때마다 더 선명해졌다. 미국의 드넓은 하늘, 영국의 흐린 회색빛, 스페인의 뜨거운 태양빛 속에서 수많은 색과 문화를 만났다.
그럼에도, 가장 한국적인 미학은 언제나 오방색이었다.
그 색을 바라보는 눈은 브랜드를 볼 때도 한결같았다. 가까이에서 다시 마주한 오방색은 한층 더 깊고 선명했다.
설화수.
그 이름을 떠올리면, 패키지의 곡선, 매장 안 은은한 조명, 그리고 광고 속 느린 호흡까지 모두 오방색의 숨결이 스며 있다. 그들에게 오방색은 단순한 다섯 가지 색이 아니다. 균형과 조화, 자연과의 교감, 그리고 전통의 기운을 이어가는 의지다. 그래서 세계 어디서든, 설화수의 브랜드와 제품 속에는 오행의 사상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다. 그 색은 아름다움의 언어이자, 한국적인 미학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의미를 담아
색을 기획하고, 브랜드를 설계하며, 그것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었다.
다섯 색, 다섯 감각
다섯 가지 색 속에는 저마다 다른 이야기가 숨어 있다.
그 이야기는 수백 년의 계절을 지나 사람들의 삶과 마음을 물들이며 오늘까지 전해져 왔다.
이제, 색채학의 언어로 그 유래와 의미를 천천히 펼쳐 보자.
파란색, 청색은
나무의 숨결을 닮았다.
봄이 오면 새싹이 돋고 하늘은 더 투명해진다. 그 생명력과 상쾌함이 이 색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옛 조상들은 파란색과 초록색을 굳이 나누지 않았다. 하늘빛도, 숲의 초록도 모두 ‘푸르다’ 한마디로 불렀다.
파란 염료가 귀해 쉽게 구할 수 없었던 시절, 자연의 모든 싱그러움이 그 한 단어 속에 함께 숨 쉬었다.
‘푸르다’라는 말이 ‘풀’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자연이 언어 속에 스며든 아름다운 증거였다.
조선시대 이후, 청색은 오랫동안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젊음과 도전의 기운을 품고, 백색과 함께하면 맑고 깨끗한 마음을 더 또렷하게 드러낸다.
물결처럼 차분하고 안정적인 청색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집중과 신뢰를 불러온다.
나에게 파란색은 깊은 대화를 나누는 새벽 공기 같다. 혼자 있어도 평온함이 스며드는, 고요한 빛깔이다.
빨간색, 적색은
불의 기운을 품은 색이다.
오늘날엔 매운맛을 떠올리게 하지만, 옛날엔 쓴맛과도 함께 쓰였다. ‘빨강’이라는 말은 ‘붉다’의 명사형으로,
본질적으로 뜨거운 불꽃과 같다. 오방신 가운데 남쪽을 수호하는 주작(朱雀)은 불새다. 자신의 불기운을 제어하지 못해 사방으로 퍼뜨린다. 그래서 적색은 가장 강한 기운을 지닌 색으로, 악귀를 물리치고 양기를 불어넣는 힘을 가졌다.
오행의 순환 속에서 적색은 태어나고, 변화하며, 왕성해졌다가 사라진다. 조선시대 왕의 옷에 붉은색이 주로 쓰인 이유다. 불꽃처럼 뜨겁고 직선적인 에너지를 지닌 적색은 심리학적으로도 활력과 자신감을 높이고 목표에 집중하게 한다.
그래서 빨강은 한때 축제와 잔치의 색이었고, 지금은 도전과 열정을 상징하는 색이 되었다.
노란색, 황색은
땅의 기운을 담은 색이다.
‘노랑’은 ‘노랗다’와 ’누렇다‘에서 비롯되었다.
황색은 밭 흙빛에서 비롯된 색이다. ‘밭은 누렇다’는 말처럼, 황토빛은 넓고 따뜻한 땅을 닮았다.
우리말에서는 ‘노랑’보다 ‘황색’이라는 말이 더 전통적이고 어울린다.
오방정색 중에서 가장 높은 서열을 지닌 색으로, 동양에서는 하늘의 기운이 닿는 황제의 색, 황금색으로 여겨졌다. 반면 서양에서는 때로는 경박하거나 시끄러운 의미로도 쓰인다. 햇살처럼 따뜻하고 낙관적인 황색은 심리적으로 창의성과 사교성을 북돋운다.
길가에 핀 노란 들꽃이나 이른 아침 햇살은 언제나 마음을 밝고 환하게 여는 힘을 지녔다.
흰색, 백색은
금의 기운을 지닌 색이다.
분노와 순수를 동시에 품고 있으며, 과거에는 매운맛과도 연관되어 사용되었다. 옛 우리나라에서 백색은 자연 본연의 색으로 여겨졌다. ‘백의민족’이라는 말도 흰옷을 즐겨 입어서가 아니라, 조선시대에는 다른 색을 쓰지 않는 절제된 미의식에서 비롯되었다. ‘희다’라는 말의 어근 ‘희-’는 태양을 뜻한다. 그래서 태양을 백색으로 인식했다. 백색은 오방정색 중 하나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색이기도 하다.
순수하고 꾸밈없는 사상을 직접 드러내는 색이다. 특히 백색과 청색이 어우러질 때는 순수함과 깨끗한 정신이 모여 자연과 동화되는 의미를 갖는다. 이 때문에 원색에서 벗어나 채색을 금하는 사고방식으로도 전해졌다.
또한 백색은 소복의 색이라 궁중에서는 금기시되었다. 순수함과 새로움을 상징하는 백색은 시각적으로 여백과 시작을 뜻하며, 마음을 깨끗하게 정리해 주는 힘이 있다.
흰 한지, 눈 덮인 들판, 비 온 뒤 맑게 갠 하늘— 모두 새 마음가짐을 주는 장면들이다.
검정색, 흑색은
물의 기운을 품은 색이다.
슬픔과 깊이를 상징하며, 겨울과 죽음의 세계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검정’이라는 말 속 ‘검-’은 ‘검다’의 어근이다. 고대에는 ‘검’이 ‘흑’과 같은 뜻이었다. ‘검다’는 명사 ‘검’이 형용사로 변한 말이다. 흑색은 오방정색 중 하나로, 고려시대에는 귀족의 색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적색 옷 위에 검은 망사를 드리워 고급 관료들의 복식으로 쓰였다. 중세부터 현대까지 검정은 고급스럽고 권위 있는 색으로 인식되어 왔다.
심리적으로 흑색은 깊이와 신비로움을 전하며, 집중력과 보호받는 느낌을 준다.
깊은 밤하늘, 바닷속, 오래된 나무 그림자 속에서 나는 안정감을 느꼈다.
오방색의 질서는 단순히 색과 방향을 짝지은 것이 아니다.
그 속에는 자연과 우주의 법칙, 그리고 삶의 균형이 담겨 있다.
동쪽의 청색은 봄의 생명력을 품고, 남쪽의 적색은 여름의 활기를 상징한다.
가운데 자리한 황색은 땅과 중심을 뜻하며, 서쪽의 백색은 청정과 치유를, 북쪽의 흑색은 깊은 물과 같은 힘을 나타낸다. 내가 좋아했던 이 다섯 색의 조합은 단순한 미적 취향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과 나를 잇는 조용한 언어이자, ‘삶의 본질을 담은 코드’였다.
전통 의상, 음식, 건축물, 작은 소품까지 오방색이 자연스럽게 스며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왜 우리 문화 전반에 오방색만 이렇게 다양하게 쓰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조선 성종 19년에는 간색을 불순한 색으로 여겨 대부분 정색만 사용하게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처럼 오방색은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습관이자 전통이었다. 각 색상의 의미와 상징을 이해하고 오방색을 활용한다면, 우리 문화의 깊이를 더 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나는 깨달았다.
세상은 생각보다 넓고, 사람마다 색깔이 다르며, 그 다름 속에서 배우고 성장한다는 것을. 균형 있게 배색하면 공간과 스타일 모두에 안정감과 개성을 동시에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물론, 원색 계열은 때로 너무 강렬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비율과 톤을 조절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예를 들어, 선명한 빨강 대신 톤 다운된 적색을 쓰거나, 푸른색에 회색을 살짝 섞어 차분하게 만드는 식이다. 이렇게 색의 ‘강도’를 조율하면 전통의 깊이와 현대의 세련됨을 모두 살릴 수 있다.
컬러는 머리로 외우는 지식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스며드는 감각이다.
그렇게 스며든 색은 오래도록 남아 깊이 기억된다.
결국, 색은 ‘보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오방색은 우리의 과거를 품고 있으면서도, 현재의 라이프스타일 속에서 충분히 새롭게 경험될 수 있다.
당신이 하루를 보내는 공간과 물건 속에 작게라도 오방색을 담아보면, 그 순간부터 색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기억과 이야기를 만드는 동반자가 된다.
● 파랑(청): 서재나 작업 공간의 벽면, 쿠션, 러그에 포인트로 사용하면 집중력을 높여준다.
● 빨강(적): 식탁보나 액자, 조명 스탠드에 소량 사용해 공간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 노랑(황): 거실이나 주방에 따뜻한 분위기를 더해주며, 아침 햇살 같은 긍정 에너지를 준다.
○ 흰색(백): 벽면과 가구의 기본 톤으로 사용하면 여백과 개방감을 준다.
● 검정(흑): 프레임, 손잡이, 가구 다리 등 디테일에 쓰면 공간이 안정되고 세련돼 보인다.
●+○: 시원하고 깨끗한 조합, 여름 시즌에 특히 어울린다.
●+●: 에너제틱하고 눈길을 끄는 조합, 이벤트나 프레젠테이션 날 포인트로 좋다.
●+●: 세련된 강렬함, 중요한 미팅이나 무대에서 자신감을 높인다.
●+●+●+●: 색동저고리처럼 3~4색을 적절히 전통 조합 활용한 믹스하면 현대적인 믹스매치 룩이 가능하다.
‘‘한국의 색’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오방색은 다섯 가지 원색의 조합이라 때로는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뉴욕에서 활동하는 윤협 작가님은 오방색과 전통 문양을 세련되게 재해석하며 현대 미술계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오방색은 전통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의 일상과 공간, 스타일 속에서 새롭게 빛나고 있다. 작은 포인트부터 시작해 나만의 오방색 활용법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