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함이 아닌, 노력의 결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늘 ‘문화’에 꽂혀 있었다.
아마도 다양한 나라에서 온 친구들과 놀면서,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였을까.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단어‘보다 ‘맥락‘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보낸 유년기와 사춘기 시절.
그 시절은 나에게 유난히도 버겁고 낯선 시간이었다. 낯선 환경에서 친구를 만들기 위한 첫걸음은 언제나 언어였다. 말을 건네는 순간이 곧 나의 용기였고, 그 작은 시도가 관계를 열어가는 열쇠였다.
그렇게 하나씩, 영어와 불어, 그리고 스페인어를 배우면서 깨달았다. 언어는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이해하는 창이라는 것. 언어를 전공한 이유도 단어를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언어는 단순한 소통 수단을 넘어, ‘세계관’을 담는 그릇이다.
영어의 직설적이고 구조적인 표현은 효율적인 사고를, 불어의 섬세한 뉘앙스는 감각적 세계를, 힌국어의 조사와 문법은 관계와 맥락을 중시하는 문화를 비춰준다. 나는 언어를 배우며, 마치 서로 다른 색을 가진 안경을 하나씩 쓸 때마다 세계가 조금씩 다르게 보이는 경험을 했다.
이 경험은 훗날 글로벌 비즈니스 현장에서 큰 힘이 되었다.
숫자와 데이터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사람들의 행동, 문화적 코드 속에 숨어 있는 소비자의 욕망. 그것을 읽어내는 데 언어적 감각은 단순한 스킬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돌아보면, 언어를 전공했다는 것은 내 커리어에 있어 ‘두 번째 씨앗’이었다.
첫 번째 씨앗이 색을 통해 세상을 느끼는 감각이었다면, 두 번째 씨앗은 언어와 문화로 세상을 이해하는 능력이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씨앗은 결국 만나, 브랜드와 경험을 설계하는 지금의 나를 만들어 주었다.
언어를 공부하던 시절, 교수님이 해주신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언어를 잘 안다는 것은 문법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언어를 통해 그 문화의 사고방식을 알게 되었고, 지금도 내가 하는 연구와 일에 큰 맥락이 되고 있다.
언어와 문화, 그리고 색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스페인에서는 음식의 풍미를 표현하는 단어가 매우 다양하다. 단순히 ‘맛있다’라고 말하는 대신, ‘delicious’, ‘bueno’, ‘rico’ 등으로 조금씩 다른 뉘앙스를 전달한다. 그중 ‘rico’라는 단어는 영어로는 ‘rich’, 즉 ‘풍미가 깊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스페인 사람들은 핫초코 한 잔을 마실 때도 단순히 달콤함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초콜릿 본연의 깊은 맛과 질감을 충분히 느끼도록 진하게 만든다. 나는 그 광경을 처음 보고 놀라면서, 같은 ‘음식’을 경험하더라도 문화와 언어에 따라 그 느낌과 표현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실감했다.
언어적 차이는 색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자주 사용하는 색은 주로 따뜻한 계열색이고, 그 색들은 더 발달되어있다.
특히, 프랑스어에서 갈색을 구분하는 단어 ‘마룬(marron)’과 ‘브룬(brun)’을 예로 들 수 있다. ‘marron’은 자연 속 밤 열매의 색을, ‘brun’은 나무나 어두운 갈색을 의미한다. 단순히 시각적 차이뿐 아니라, 자연과 환경, 문화적 맥락이 세부 색을 구분하게 만들었다. 이런 언어적 세분화는 그들의 문화적 관찰력과 세심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나에게는 색을 통해 문화를 읽는 새로운 관점을 열어 주었다.
색채 문화사는 내게는 너무 흥미로운 주제여서 박사 논문으로 깊이 탐구하고 싶었다.
하다보니 아쉽게도 내가 구상했던 주제를 풀어내기에는,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자료가 부족했다.
그래도 나는 색채 문화사를 꾸준히 연구한다. 색과 언어는 단순한 시각적 정보나 단어를 넘어, 그 사회의 역사와 감각, 생활 방식을 비춘다.
빨강, 노랑, 파랑 같은 기본 색조도 문화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서양에서는 빨강이 ‘열정’, ‘힘’, ‘경고’ 등을 상징하며, 다양한 빨강을 구분하고 표현하는 문화적 이유가 수백 년 미술, 종교, 사회적 상징 속에 자리 잡았다. 반대로 자연과 밀접했던 문화권에서는 큰 범위의 색 구분만으로 충분했기에 세부 색 명칭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처럼 음식과 맛, 색과 언어는 모두 한 사회의 감각과 역사, 문화적 맥락 속에서 탄생한 ‘표현 방식’이다. 나의 경험은 이 미묘한 차이를 읽어내는 능력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능력은 브랜드와 소비자의 감각을 연결하고, 글로벌 경험과 문화적 통찰을 기획에 녹여내는 나만의 전문성으로 자리 잡았다.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 한마디에 시작했던 일은, 나에게 음식에 대한 새로운 인사이트를 얻게 해준 값진 기회였다. CJ 비비고가 영국 테스코(Tesco)에 첫 발을 내딛던 시절이었다.
영국 소비자에게 만두는 낯선 존재였다. 호기심 어린 눈길, 망설임, 조심스러운 손길—음식 하나를 두고 이렇게 다양한 반응을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문화가 바뀌면, 익숙한 것도 완전히 새로워진다는 사실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단순히 제품을 진열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시식 공간을 마련하고, 만두의 이야기와 조리법을 자연스럽게 전하며 소비자가 브랜드와 처음 마주하는 순간을 설계했다. 작은 팝업 하나에도 마음을 담았다.
결과는 값졌다. 입점몇 개 점포에 입점이 확정되면서, 한국식 만두는 영국인의 일상 속으로 조심스럽게 스며들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브랜드 경험은 단순히 제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감각,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