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닌 글을 쓰던 중이었다. 누군가 화려한 인간을 가면으로서 내세우려던 참이다. 언변으로 사람들을 휘어잡곤 이내 사라지는 망토의 인간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치장엔 재능이 없음을 알게 된다.
통찰하는 인간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건 내가 아니다. 난 무언가를 통찰할 여력이 없다. 쥐어짜며 안간힘을 써봐야 통찰을 삶의 일부로 여기며 살아가는 인간들과는 상대도 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이는 가벼운 간식과도 같을 테다. 통찰과 논리에 뜻이 없음에도, 무언가에 대한 어떠한 고찰, 부여잡을 수 없는 명료함에 대한 갈망과 허영심이 나의 결여를 잊게 만들곤 한다.
물론 이런 시도들은 거의 무의미로 종결된다. 어쩌면 나 또한 얕은 인간들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껏 쏟아낼 듯이 연기하면서도, 사실은 입에서 꺼내 선보일 것이 없다. 유난히 빛난다거나 냉철한 것은 나에게 없다. 단지 상념이 많아 뇌 주머니가 부풀어 올랐을 뿐, 진정 무게 있고 중요한 것은 그 안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망하진 않았다. 이렇게 주절주절 적어내리는 게 결국 나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나를 부여잡는다.
인간이 생을 살아가며 낳는 글들은, 탄생하는 동시에 저마다의 생명력을 지닌다. 어머니에게 생명을 부여받았음에도 오히려 아이가 어머니에게 삶의 의지를 불어넣곤 하듯, 글들은 인간에게 힘을 부여하곤 한다. 상념으로 머문다면 고여 썩어버릴 말들이, 적는 행위로 정제되어 글로서 인간에게 스며들게 돕는다. 그렇게 글과 살아가며 생각의 파편들을 계속 주머니 안에 담다 보니, 의외로 나의 말과 행위가 묘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주절대더라도, 진실된 나로써 살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나 고유의 정신이자 신체로 사고하며 행위한다. 나의 자아와 행위는 분리될 수 없다. 글은 둘의 결속을 단단하도록 돕는다. 정신을 표출하는 활동, 의식과 행위가 동시에 존재하는 삶의 순간들이 진정한 나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몸과 정신이 서로에게 녹아들어 간다. 작동이 정신에 깃들고 사유가 행위에 깃들며 총체적인 '나'를 이루고 발전시킨다. 나는 그 과정 자체를 느끼며 존재하는 것으로 오롯한 나로서 살아가게 된다.
진정한 자신은 의식과 행위 모두를 소유해야만 얻을 수 있다. 자기애적이고 강박적인 자아 과잉 세계에 갇히는 것으론 자기 자신을 알 수 없다. 본인의 명료한 실체를 알려는 열망에 휩싸이더라도, 그저 고뇌하는 것으론 불가능하다. 애초에 그것을 알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고,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인간에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실을 통한 확신이란 있을 수 없다. 진실들은 그저 진실이라고 착각되는 것들일 뿐, 궁극적이고 종결적인 진리가 아니다. 니체가 그랬듯이, 진리란 없고 해석만이 있는 것이다. 인간 세계의 모든 것이 그렇고, 그 일부인 자신에 대한 것도 절대적으로 그렇다. 고민할수록 알 수 없게 되어가는 것이 자신이다. 스스로를 안다고 확신하며 자기가 아는 자신에 대해 떠벌리는 사람들은 멍청이에 거짓말쟁이다. 그들은 자신이 거짓말을 한다는 것조차 모른다. 병적인 정도일 수도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자아에만 매몰되어 생각의 우물에 같히는 것으론 진정한 나에 다가갈 수 없다. 대신 세계의 단상을 알고, 능동적인 행위로 현실을 살아가는 것으로 얻을 수 있다. 불명확성, 허위, 혼란을 알며, 세계의 잿빛 인상을 인지하고 관조하는 동시에 사유를 외부로 표출하는, 행동하는 사색가의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한 삶의 길 위에서라면, 어깨를 감싸는 공허감이 인간의 온기를 빼앗고, 불안과 혼란에 잠겨 몸과 마음이 덜덜 떨릴 때조차 진정한 나로서 실존하는 것이 가능하다.
진정한 자신을 얻는 것으로 예술적인 삶도 달성된다. 뒤샹은 재능과 독창성이 풍부했음에도, 예술 작품들을 만드는 것에 전념 하는 대신, 예술로서의 삶을 직접 살아가기를 바랐다. 자신을 규명하고 작품에 투영하는 것에만 노력하지 않는다. 무엇을 위하여 분투한다면 높은 예술을 이룩할 수 있는지 미학적으로 분석하는게 아니다.
직접 살아가야만 한다. 아름다운 삶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관념에 매몰되어 실제의 삶을 잃지 않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완연하고 풍부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깊은 곳의 의지와, 인간과 세계를 만날 때 느껴지고 믿어지는 의식과 감정을 따르는 것이다. 맹목적으로 본능 안에서만 허덕이는 게 아니다. 자아 안에만 머물며 끈적한 상념만을 뭉치는 것 또한 아니다. 분명한 현실로서의 생을 직시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감정과 정신에 귀 기울이며 자신을 고양시켜야 한다. 벽들에게 덤벼야 한다. 맹목적인 것으로 보이는 현실의 벽을 부수며 나아가는 것이다.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삶은, 가만히 벽에 매달려있는 작품 훨씬 너머의 것이다. 지루한 듯 반복되면서도, 매일 변주되며 다른 결을 보이곤 하는 하루들을, 애정을 담은 편지를 한 자 한 자 눌러쓰듯 힘주어 살아가는 것이다. 진정한 자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온전한 삶을 향유하는 것과 같다. 내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이런 나이자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