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by 김존재


난데없이 화사한 하루가 있는가 하면, 이유 없이 무기력한 날도 있다. 무기력은 인간들을 룰렛처럼 펼쳐놓고 무작위로 날아가 깃드는 것 같다. 누가 어떤 순간에 무기력에 휩싸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온 힘을 쏟아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갑작스레 다가올 수도 있고, 무기력에 어울리는 차분한 날에 가벼이 안착할 수도 있다.


오늘은 나에게 왔다. 잠에서 깨면 묘한 기분이 들게 하는 흐릿한 꿈이 있듯이, 모호한 과녁을 등에이고 힘겨이 걸어가야만 하는 날도 있다. 다트를 던져 꽂아야만 하는데, 다트판도, 내 손도, 시야도 하나같이 삐딱해서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다. 무기력이 몸과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다.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는 좌절된다. 말을 듣지 않는 의지는 결국 우울을 불러온다. 무기력이 우울을 모방하는지 그 반대인지는 모르겠으나, 둘은 다른 듯 비슷하고, 자주 함께 온다.


애독하는 블로그에서 노예의 시간/ 주인의 시간 개념을 읽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노예의 시간 안의 인간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사회나 본능을 비롯한 모든 외부적이고 반강제적이며 무의식적인 요소들 덕에 갖게 된 목적들을 위해 노력하고, 주인의 시간 속 인간은 내부로부터 유유히 만족하는 행복을 즐긴다. 노예의 시간에 인간은 돈이나 연애나 외모 같은, 사회에 의해 가치를 부여받은 것들을 위해 노력한다. 주인의 시간에 인간은 어떤 비주체적 갈망에도 휩싸이지 않은 채 진정으로 행복을 음미한다. 그러나 삶의 대부분은 당연하단 듯이 노예의 시간으로 쓰인다.


문제는 우울의 시간이 어떤 카테고리에 속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가만히 침잠하는 우울은 노예에게도 어색하고 주인에게도 거추장스럽다. 내가 분명히 살아온 시간들이 누구에게 어울리는지 규명할 수가 없다. 정말로 그런 하루를 보냈는데도 말이다.


우울은 노예의 시간에 포함되지 않는다. 누구도 우울을 권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는 우울을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우울로부터 벗어나는 법, 무기력한 자신을 변화시키는 법, 침대에서 일어나는 법, 긍정적인 사고를 하는 법, 사고를 마비시켜 인간을 우울하지 않게 살도록 돕는 우스운 이야기들을 사람들에게 가져다준다. 인간 세계의 무엇도 기꺼이 우울해해도 좋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울은 어디까지나, 분명 존재하며 가끔은 필요하지만 결코 당신의 전부여선 안 되는 감정이다. 사회 표면에 얼굴과 표정을 갖고 등장하는 우울의 모습은, 수렁, 정체기, 새로운 삶을 향하는 길목으로서 여겨질 뿐, 종착지로서 취급되진 않는다. 개인의 우울과 절망은 안타까운 것으로 여겨지며, 인간의 일부라기보단 그들의 짐짝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울은 주인의 시간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우울이 행복일 순 없기 때문이다. 그것에 잠겨있는 시간이 행복일 순 없다. 둘은 양립할 순 없다. 나는 무기력을, 우울을, 혹은 둘 다를 느낄 때, 행복과 떨어져 있었다. 우울에 만족을 느끼긴 한다. 우울한 때의 가라앉은 상념이나 대화들이 나에게 정신적인 충족을 줄 때는 많다. 종종 우울이 삶에 박차를 가해준다고 느끼는 것은, 침잠 덕에 달성할 수 있는 어떠한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절망들은 완전히 인간 안에 가라앉은 순간에, 우울한 색으로부터 탈피하여 생의 빛을 안겨주는 것일 수도 있다. 카뮈가 안과 겉에서 말하듯, 생에 대한 절망이 없이는 생에 대한 희망 또한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울한 찰나 자체의 행복을 말하진 않는다. 우울을 느낄 때, 나는 분명 우울한 것이다. 만족도 발전도 감정에서 벗어난 이후의 일일 뿐, 무기력할 때의 난 분명히 무기력하고, 슬플 때의 난 분명 슬프다. 항상 절망만을 갖는다면 나는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며 병들어갈 뿐일 테다. 내가 그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나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삶에서 침잠 다음 단계의 감정을 느낄 때는 전의 감정들에서 다른 것으로, 층에서 층으로 옮겨가듯이 이동하는 것이다. 우울의 층은 내 안에 분명히 남아있으나, 나에겐 아주 다면적인 감각의 공간들이 있고, 그 층에만 머물기엔 제자리에 가만히 있지 못하는 기질이 나를 간질이기에, 참지 못하여 다른 감각들로 가득 차 있는 층으로 뛰쳐나가버리곤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울은 행복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될 순 있으나, 우울 자체가 행복은 아니다. 우울할 때의 나는 행복하지 않다. 진심 어린 행복의 표정을 입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때에는.


그렇기에 우울의 시간은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우울엔 목적성도 행복도 없다. 진정한 우울엔 원인 또한 없다. 무기력처럼, 우울은 문득 자아의 자물쇠를 망가뜨리고 인간의 안에 마음대로 들어앉아 버린다. 인간은 그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버렸을 때, 우울이 들어서버렸음을 뼈저리게 느끼며 우울의 뿌리를 더듬어 이유를 밝히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우울은 애초에 제멋대로 들이닥쳐 집을 부숴버리고 떠나는 강도인 것이다. 집주인은 찢어진 옷가지들이나 무너진 가구들 옆에 망연히 앉아서는 -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비참해진 거지 - 하며 고뇌하는 것이다.


우울이 무엇으로도 규정되지 못하는 것은, 이것이 변종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우울은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것이 아니다. 주저앉은 인간은 자연의 관점에선 도태된 것일 뿐이다. 자연의 신은 우울한 인간을 실에 조종당하는 인형처럼, 활력을 잃은 껍데기처럼 바라볼 수도 있다. 우울을 즐긴다고 생각하곤 하지만, 사실 익숙해지는 것일 뿐이다. 황폐해진 방에 기거하는 것이 익숙해지다 보면, 창 밖에 별빛들이 눈에 차기 시작한다. 그들을 바라보며 슬프고 낭만적인 공상에 잠겨 그들을 유희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우울이 나의 정신을 잡고 흔드는 대로 춤추는 중에, 가끔 나의 동작에 만족하는 것일 뿐이다. 무기력 안에서 이런 고민들을 가졌다. 속한 곳 없는 외톨이 우울이 자주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기묘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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