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현재를 끊임없이 정당화한다. 인간이 선택하는 살아갈 이유들은 삶을 합리화하는 수단이다. 허무주의의 무게에 눌리는 대신, 부정적인 감각을 털어버리고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이다.
삶은 참 멋지다, 삶을 저버리지 못하는 인간들에겐근원적인 생의 애착이 되는 이미지가 하나씩 있다. 그리고 대부분은 사랑을 상징한다. 온화함, 활기, 쾌락, 포옹을 드러내는 상징들은, 현대인들이 삶을 살아가게 해주는 원동력이 애정과 사랑이 되었음을 드러낸다. 성장기의 애정 부족, 박탈감이 인간에게 과거보다 더욱 뚜렷한 영향을 끼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삶을 사랑해 살아갈 이유가 필요한 인간은 그것을 만들어내고, 삶이 역겨워 슬픈 인간들은 허무, 회의, 염세에 빠진다. 인간들이 삶에 대해 갖는 인식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사랑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사르트르는 생이 허무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삶을 살아오던 습관 때문에 죽지 않고 계속 살아간다고 말한다. 그러나 일정한 패턴은 습관 덕분에 유지될지언정, 삶 자체를 이끌어가는 힘은 습관에 의해 나오지 않는다. 생을 향한 의지와 습관이 존재함에도 그걸 꺾어버릴 슬픔이 있는 인간들은 존재한다. 생은 허무이기에, 이 허무를 경험적으로 느끼는 순간, 생을 이어나갈 의지가 결여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살에의 절망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반대로 삶에 하등 살 이유가 없음에도 절망을 문질러대며 생을 이어나가는 인간들도 존재한다.
둘의 차이는 생에 대한 사랑의 정도에서 기인한다.사랑은 맹목적인 것이다. 종교의 신앙과도 흡사하다. 인간 객체의 생존과 연명에 아무런 가치가 없을지언정, 인류의 존속이 우주의 멸망이 도래할 때 공허한 것으로 변모할지언정, 현재의 삶 자체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삶에 대한 의지가 빛바래지 않는 것이다.
생의 사랑은 단순한 생존 욕구나 종족 보전 욕구와는 다르다. 힘에의 의지와 비슷한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힘의 의지론 자살을 설명 못하는 것 같다. 니체는 자유로운 죽음을 긍정하지만, 이 죽음은 삶의 절망에 허덕여 내몰리듯 저지르는 자살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노쇠를 받아들이고 죽음마저 의식하는 인간으로서 담대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울 속 자살은.
그렇기에 삶의 의지는 힘에의 의지 이전에, 인간 본인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타자에 의한 사랑에 의해 결정된다. 유아기, 청소년기 때에 축적되어 평생 인간을 떠나지 않는 근원적인 사랑, 오직 그 시기에만 형성되는 무한한 사랑의 샘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다. 인간과 사회가 유리될 수 없는 것은 그래서이다. 기본적으로 어머니에게, 그리고 아버지에게 사랑받기 위해선 그 감정을 지탱하기 위한 실제적인 구조가 필요하다. 그 구조를 마련해 주는 것이 거대한 사회의 틀이다. 사회가 사랑보다 앞서는지 사랑이 사회 보다 앞서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루소가 사회가 형성되며 인간 사이의 불평등이 발생되었다고 주장한 것처럼, 사회가 형성되면서 본능적 욕망 이상의 사랑이 인간에게서 자라기 시작한 것이라 상상해보면 흥미롭긴 하다. 인간들의 연애가 상황과 거리의 맥락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궁극적으로 인간을 살아가도록 돕는 생의 사랑은 본인의 의지와는 분리되어 타자들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