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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존재 Apr 25. 2020

미묘한 강박

내가 현재를 온전히 느끼지 못하는 것은 미래에의 강박 때문이다. 더 나은 음악을 들어야 하고, 더 나은 책을 읽으면서 더 나은 말을 해야 하고, 더 나은 감각을 갖춰서 예술을 감상하고 옷을 입어야 하고, 더 나은 소통을 사람들과 해야 하고, 더 나은 외양을 갖춰야 한다. 그래서 사운드클라우드에서 좋은 노래들을 찾아다니며 흔들거리는 대신 눈앞의 에리히 프롬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 날 방해하는 것이다.


이건 정말 별로다. 현재에도 집중 못 하고 미래에도 집중할 수 없다. 당장 내게 와닿는 음악을 질릴 때까지 듣다가 질려버리는 순간 책을 펴면 되는 것인데, 의식이 비치는 화면 바로 옆에 책이 계속 아른거린다. 책은 내게 외치는 것이다, 그럴 때가 아니라고.


같은 음악 안에서도 그렇다. 지금 음악을 감상한다면 타인에게 구리던 좋던 그들의 판단을 떠나 내가 지향하고 즐기는 음악과 부합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나의 작곡을 떠올리더라도, 어차피 난 내가 싫어하는 건 만들 수도 없고 만들 리도 없기에, 내가 좋아하는 보다 나은 것들을 듣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왠지 더 나은 무엇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탐구욕 때문에 놓치는 것이다. 


음악을 들으면서도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 좇긴다. 책에의 갈망은 진리로 이르는 길이라기보단 그저 내가 더 나은 것이라고 느끼는 글들을 읽으려는 욕망이다. 뭔가를 바라고 이러는 것일 테지만, 이걸로 뭘 이루려 하는진 알 수 없다. 타인에게서 인정받는 걸 원하는 걸 수도 있고 지적으로 아주 높이까지 나아가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정확히 무얼 원하는진 모른다. 명확히 파악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니다, 혼재되어 있을 게 분명하니까. 


어차피 모른다면 그냥 보다 나은 현재의 지향점을 따르는 것으로 충분한데, 과도히 현재를 넘어선 것을 자꾸 원한다. 이건 나의 과욕이다. 과욕인 걸 알고, 내게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욕구임에도 통제가 안 된다. 욕구가 그런 것이니, 모든 쾌락에의 탐닉과 마찬가지이다. 나의 쾌락은 보다 나은 인간이 되는 것이다. 


눈앞에서 책을 치워버려야 하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어차피 책을 읽을 수 없다. 특히나 사랑의 기술같이 감정과 의식 둘 다가 온전해야만 하는 책을 읽을 땐 그렇다. 두 번째로 읽는데, 전보다 훨씬 즐겁게 읽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이런 시기가 도래했다. 글을 읽는 것관 별개로 정신과 마음에 흡입되진 않는다. 어제부터 들뜬 기분이 가라앉질 않아서, 관심이 수십 개로 흩어졌다가 오므려졌다가를 반복한다. 그냥 책은 던져두고 혼선 없이 음악이나 머리에 터질듯이 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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