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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존재 Nov 29. 2020

침묵과 신

때론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침묵이 찾아온다. 공기 중에 떠도는 고요한 현실감만이 나를 감싼다. 귀가 먹은 채 하늘을 부유한다면, 혹은 아파트 모양의 우주를 부유한다면 이런 기분일 것이다. 구름으로서 떠다니는 것과는 구분되는 감각, 투명한 인간으로서 눈만 껌벅거리는 꼴이다.



거리의 침묵은 도시인에게 괴리감을 준다. 기독교인 친구가 내게 전해주었듯, 구원받은 자들만이 하늘로 사라지는 '휴거'가 일어난 건 아닐까. 그러나 이 도시에 구원의 자격이 있는 자들은 몇 되지 않을 것이기에, 신에 의해 박탈당한다는 한편의 두려움은 사라진다.



낙관은 낙관을 경험한 자들에게 허락된다. 회의는 회의를 느낀 자들에게 주어진다. 절망은 절망 안 인간들만 부르짖는다.



신도 마찬가지이다. 신을 경험한 자들만이 신을 말한다. 그러나 무엇이 신인지 규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에겐 각자만의 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관념 속 신은 공유될 수 없다. 엄마라는 단어가 개인에게 다가오는 의미가 다르듯, 신 또한 마찬가지이다. 신학적으로 각자의 성령을 믿고 살아간다. 모두가 신을 통해 같은 믿음을 공유한다는 안일한 상상을 한다.



신을 거부하면 지옥불에 탄다. 그러나 세계엔 신을 접하지도 못한 채로 세계의 악에 절여져 죽음에 도달하는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넘쳐흐른다. 신은 만인에게 기회를 주었다고 하지만, 신에게 만인이란 일부를 의미하는 듯하다.



믿음은 결국 최면제이다. 그들이 믿는 신이 악마일 가능성은 신이 악마가 아닐 가능성 만큼 존재한다. 신의 장난에 놀아나고 있을 가능성은 장난에 놀아나지 않고 있을 가능성과 동일하다. 그럼에도 믿음은 굳건하다. 신앙은 인간에게 적재적소의 마취제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나는 천국에 가니까', 얼마나 행복한가.



파스칼의 논리는 옳다. 신앙은 밑져야 본전이므로 신을 믿는 것이 낫다. 그러나 그는 신 자체가 하나의 농담일 확률을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전지전능, 정의롭고 선하며 두려운 신'을 신의 기본 속성으로 착각한 것, 그것이 파스칼의 오류이다. 신이 애초에 그런 모양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성경과 인간의 상상일 뿐이다.



신이란 존재가 죄를 인간의 탓으로 돌려 지옥불에 넣는다니 얼마나 옹졸한가. 애초에 불완전한 존재로 창조한 것은 자신이면서, 불완전한 자유의지를 자신을 위해 쓰지 않았단 이유로 신앙 밖의 인간들을 저주한다는 것이다. 신은 전지전능할지언정 편협한 존재임에는 틀림없다.



신은 약자들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약자가 아닌 인간은 신에게 종속되지 않는다. 약자의 정신 안에 신은 존재하나, 약자가 아니라면 신은 믿을 수도, 두려워할 수도 없는 존재가 된다. 도대체가 신의 정신머리를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신을 믿으며 안주하며 살아간다면 속 편하긴 할 것이다. 신은 결국 현재를 부정하고 미래를 꿈꾸는 양들의 도피처이다. 믿음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안정감은 강력하다. 사랑에 대한 믿음, 미래에 대한 믿음, 돈에 대한 믿음, 모두가 마찬가지이다. 이들이 주는 보상적 안정감은 모두 인간의 뇌가 발명한 것이다.



신은 결국 논증의 영역이 아닌 믿음의 영역이다. 신을 믿을 수 있는 인간은 선험적으로 정해진 것이다. 신을 믿는 자들은 상상의 산물 덕에 원대한 안정을 얻는다. 나 역시 신이란 존재를 상상해서 나약함을 의탁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양 떼의 일부가 될 수도, 양의 신앙을 가질 수도 없다. 신을 믿을 수 없는 뇌를 갖고 태어나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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