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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존재 Jan 02. 2023

지겹도록 살아보세요 다들


4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나는 비슷한 언어들을 뱉고 있다. 내 발화 방식은 그때 고정되어버렸던 것 같다. 언어는 생각의 틀이니 나는 말하는 방식 - 그리고 생각하는 방식을 바꿔보려 했다. 


그런데 나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해소되지 않은 근간의 무엇이 존재하기 때문인 것 같다. 지금까지 썼던 어떤 글로도 음악으로도 해결할 수 없던. 그래서 시체처럼 두 달을 보냈다. 금이 간 기반에 기둥을 세운들 금방 무너지기 마련이다. 내게 맞지 않는 변화의 시도는 반작용만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고무줄처럼 제자리.


난 여전히 이곳에 있다. 혼란스러운 채, 시도했으나 좌절된 채, 얕은 계단 두어 개만을 올라온 채. 백치의 긍정성의 역겨움을 한껏 맛보고 왔다. 덮어놓고 밝은 척하는 인간들, 스스로를 세뇌시키고 돈과 성과를 위해 달리는 인간들. 피상성을 추구하고 피상성을 입고 피상성을 먹고 찍고 말하고 노래하며 살아가는 인간들. 이젠 지겹고 역겹다. 그런 곳에서 살아가면 병이 든다. 끝없이 나불대는 입에 힘 잔뜩 준 눈에 치켜든 손까지 죄다 뜯어버리고 싶네. 


고통을 이야기하라는 건 아니고, 슬픔을 나누라는 것도 아니다. 그럼 어쩌라는 건가 싶겠지만 그냥 입이나 다물라는 소리다. 퇴색의 기쁨을 환락 없이 느끼면 어때. 숲의 일원으로 우리는 표정만 보고 그렇구나 넘겨짚고 살면 편하지 않을까. 한 마리의 동물로서 살면 끝이다. 입 없는 우리는 불안정한 서로에게 무엇도 갈구할 수 없다. 그런 곳이라면 나는 만족할 수 있을까. 물론 당신들에겐 그게 세계의 전부겠지. 너희보고 이렇게 살라고 말하지 않을 테니 썩 꺼지기만 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어울려 살아가다 보면 언어들은 홀연히 자취를 감춘다. 그래서 나의 언어는 퇴화되었다. 말을 쥐어짜보고 있다. 일과 돈, 예술과 음악과 사랑. 혼란과 평정, 친구와 금. 삶의 무늬들을 본떠 언어로 바꿔보고 있다. 때론 언어화될 수 있지만, 대부분은 말로 어찌 표현할 수 없는 어딘가로 인간을 데려가는 감각들. 감각들을 한 데 뭉쳐 형상을 조각하고 있다. 


굳이 글을 쓰는 이유는 뭘까. 굳이 독자를 상정하지 않고 되는대로 써 내려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되는대로 쓰면서도 누군가의 시선을 고려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아적 무의식을 기술하는 대신 공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럼에도 심미성을 위해 단어를 고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것들은 밝혀지지 않는다. 나의 묘비가 세워지고 살이 녹아 뼈만 남을 때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내가 노쇠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밝혀질 것이다. 그땐 어디서 어떻게 한탄을 할까.


나는 여전히 나아가고 있다. 한참 예전의 나는 늘 일기 말미에 그런 문장을 썼다. 나는 여전히 나아가고 있나. 어쩌면 나아간다는 믿음은 착각이 아닐까.


목매단 진심을 본다. 가면은 얼굴 근육에 흡착되어 있다. 대부분은 있는 그대로를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진실을 사랑한다. 진실이 인간을 찌르고 피부를 찢고 뼈를 발골할지언정 진실을 사랑한다. 진실에선 썩은 냄새가 나지 않는다.


나의 진심을 말해보자면 눈앞의 9할이 지겹습니다. 부서지고 무너지고 망가지고 불타고 별 생각 안 들 것 같아요. 부디 나의 다음 행선지는 이렇지 않길 빕니다. 지겹도록 살아보세요 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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