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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 한잔의 여유 Oct 14. 2022

자립준비청년, 보호종료아동의 이해

각 주체 개념의 이해, 그리고 정책 제도에 관한 고찰

187번째 에피소드이다.


오늘 큰 가르침을 받았다. 갓 스무살을 넘긴 이에게 내가 알지 못하는 분야에 가르침이다. 최근 고독사에 관해 관심을 가지면서 간혹 교집합이 발생하는 지점은 '보호종료아동'이다. 얼마 전 보호 종료시점이 끝난 청년이 사회로 나와 고군분투를 하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다. 일정기간 자립을 위한 지원금이 있지만 가족을 포함한 사회적관계망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다면 그 길이 상당히 고되었을 것이다. 나는 한번 그 어려움을 절실히 느낀 적이 있다. 장학금 등의 사유로 부산대가 아닌 경북대를 선택했던 스무살인 나에게 부산이 아닌 대구란 도시는 친인척 하나 없는 그야말로 신생 개척지였다. 같이 공부를 했던 친구들은 대부분 부산대를 가서 학교 내 고등학교 모임 등으로 뭉치는데 반해 학교 전체에서 나 혼자만이 선택한 경북대에서 난 굉장한 이방인이었다. "대구사람이야?", "아니.. 난 부산에서 왔는데.." 또는 "왜 부산대 안 가고 경북대 왔어?" 그 질문만 1년 내내 받았고 초창기에는 혼자 다니며 혼자 밥 먹고 혼자 공부하곤 했다. 물론 금방 내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와 사회적 관계망을 이루었고 수년 간 지나서 나는 대구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살면서 가장 자랑스러운 것 중에서 '부산' 토박이가 '대구'를 가서 엉켜붙어서 누가 뭐라해도 '대구'사람이라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있다. 그만큼 낯선 환경에서 사회적 관계망을 쌓기 힘들며 유지도, 인정받기도 어렵다.


오늘 언급한 '보호종료아동'들의 사연에 비할 바는 아니겠으나, 그 짧은 시기 내가 느꼈던 외로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하물여 '보호종료아동'들은 어찌할까. 보호종료아동은 스무살 이전 또는 직전까지를 가르키며 또 언급한 자립준비청년은 그 이후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보육원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고아원을 순화한 표현이며 그룹홈은 일시적으로 보호가 필요한 아이들의 쉼터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룹홈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은 대부분 보호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사정으로 그룹홈에서 생활하는 편이었다. 하나 눈여겨볼 정책은 '공공 후견인 제도'이다. 성인 이후 갑작스레 자립을 하게 되는 보호종료아동들을 위해 정책적으로 적극 검토되고 도입할 필요성을 실감했다. 다만 의사결정에 관여(참견)하거나 단순한 대행이 아닌 지원을 해야 한다.


3시간 가량 대화를 나누며 '명쾌함'보다는 '어려움'이 머리 속에 남았다.

상당히 꼬여있는 이해관계, 그리고 정책결정자의 선민사상에 의해 보호종료아동(자립준비청년)들은 설 자리를 잃고 있다. 크게는 두가지 지점을 고민해본다. 첫째는 '취업'이 가끔은 만능이 아니다. 일자리는 모든 이의 먹거리 창출이지만 '취업만능주의'는 사람을 힘들게 한다. 청년들의 우울, 스트레스는 대학이 아닌 직장취업 후 발생한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참고 버티면 되지'라는 선조들이 쌓아온 냉정한 진리에 의존하기엔 생각보다 우울증, 번아웃을 호소하는 청년들이 많다. 전화를 넘어 카톡, SNS 등으로 끊임없이 누군가와 관계를 강요당하고 연결되고 있다. 핸드폰을 부숴버리지 않은 이상 그곳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없다. 상대적으로 더 사회적 관계망 형성이 약한 자립준비청년에게 단순 취업 연계을 넘어 지속적 심리상담이 이어져야만 한다. 둘째는 가족 개념에 관한 변화를 생각해볼 시점이다.  사회적 가족이란 개념에 대해 적극적으로 검토해봐야 한다. 이미 피를 나눈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원수를 지거나 남보다 못할 주위의 다양한 사례를 관찰할 수 있다. 이들보다 피를 나누지 않았음에도 사회적 관계망으로 가족보다 더한 존재로 자리잡을 수 있는 현실이다. 1인 가구의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지만 1인 가구도 아주 가끔은 함께 나누고 싶은 '커뮤니티'이고 싶다. 공간구성의 절묘함으로 개인공간, 공동공간을 융합해놓은 사례가 등장하고 있다. 도봉구에 위치한 협동조합주택 '오늘공동체'가 있으며 대연동의 '모여가'가 그 사례이다. 가끔 사회적 가족이란 아젠다가 등장하면 동성애를 인정하자는 말이냐 등의 논지와 상관없는 구렁텅이로 빠지곤 한다. 절대적 진리가 있다고 믿지도 않으며 그 진리는 계속해서 변화를 마주하며 몸집을 바꿔나간다. 나는 스스로 보수주의자라고 생각하지만 시대적인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맞춰나가는 것이 진리라고 믿는다. 이걸 진보주의자라고 말한다면 나는 진보주의자이다.


앞으로 고민할 지점은 많은 시대이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고 믿는 구태연연함과, 편함에 취해 누군가 고뇌를 가볍게 여기지 않고 이해하려 노력하려 하는 말랑말랑한 두뇌가 유지되었으면 하는 바람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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