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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 한잔의 여유 Dec 24. 2022

워드프로세서 3급 필기 불합격

결국 공부는 '해야 하는 동기'를 심어주는 과정

209번째 에피소드이다.


앞으로 두 편에 걸쳐 '교육'에 관한 에피소드를 기록하려고한다. 오늘은 '동기부여' 그리고 내일은 '자발적인 선택과 자유'이다. 대체적으로 현재 난 눈치와 두뇌회전이 빠르고 그에 걸맞은 행동력까지 갖춘 편이라 소위 일머리가 있단 소리를 듣는다. 이건 객관적으로 봐도 그런 편이다.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맞춰잡는 기술이 좋은 편인데 '시험'이란 것도 결국 그와 맥락을 같이 한다. 그래서 중,고등학교에선 꽤 공부를 잘했고 특히 대학교에선 공부시간 대비 A학점을 수두룩하게 받은 편이다. 나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A학점이 많다. 한번 이런 적이 있었다. 전공과목 실험수업을 듣는데 공학적 능력이 심각히 떨어지는 난, 룸메이트였던 동기에게 데이터소스를 공유해달라고 했고 단기속성으로 배워서 실험보고서를 만들어 제출하였다. 나중에 학점이 나와보니 난 A+이었고, 룸메이트는 B+이었다. 기숙사 공기가 차가웠고 미안한 마음에 치킨을 사들고 들어왔었다. 사실 난 그 결과의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다. 내가 한 일이라곤 결국 이 실험보고서를 누가 읽을지에 대한 것으로부터 시작해 적절한 분량과 가독성을 높여주는 일 밖에 한 것이 없다. 출제자의 의도에만 집중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내적 실력향상'과는 별개로 '시험'은 잘 칠 수 있다. 다만, 이런 출제자의 의도를 생각해보게끔 하는 기본적인 공부에 대한 '동기부여'는 반드시 필요하다. 이번 에피소드는 '동기'에 관해 기술하고자 한다.


난 굉장히 병신력 깊은 '찐따'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워드프로세서 3급 필기를 불합격했다. 음.. 기억으론 시험치러 갔던 클래스에서 유일하게 불합격했을 것이다. 난이도는 운전면허시험 필기와 비슷하다고 들었고 난 가차없이 불합격했다. 키 작고 뚱뚱하고 가난한 내가 의기소침해 '찐따'로서 마주한 첫 시험이다. 그것을 알게 된 같은 반 친구들이 수없이 놀려댔다.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하고 묵묵히 그저 찐따같이 참고만 있었다. 내가 무언가 할 수 있다는 '동기부여'를 가지게 된 건 우리반 싸움짱인 친구집에 반강제로 놀러갔다가 그 집 책꽂이에 꽂혀있던 '고구려왕조700년'(초록색)으로 된 만화책이었다. 그걸 읽다가 너무나 재밌어 친구에게 용기내서 "이 책을 빌려줄 수 있겠냐"고 물었고 집에 와서 뚫어지게 독파했다. 아마 아버지도 그전까지 미래가 전혀 없어보이던 '찐따' 아들녀석이 무언가 그렇게 집중하는 모습을 처음 봤을 것이다. 을파소의 진대법, 명재상 명림답부 등등 지금도 기억이 생생히 나는 문구를 외우는 모습은 아버지가 내게 백제왕조700년, 신라왕조1000년, 고려왕조500년, 조선왕조500년이란 시리즈 만화책을 사주게 되었다. 6학년이 되었고 국사는 한 과목이 되어 버젓이 시험을 치루게 되었다. 학교수업 중에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당시 거느리고 온 군사 수가 113만명 표기된 부분에서 손을 들고 "저.. 113만 3800명 아닌가요? 그렇게 기록되어있는 걸 봤는데" 학교에서 '찐따'가 손을 들고 자발적으로 발표하는 건 다들 생전 처음봤을 것이다. 강제로 발표를 시키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말도 제대로 못해 울곤 했던 '찐따'였으니 말이다. 그 학기 시험을 쳤는데 수학은 20점을 받았지만 국사는 92점을 받았다. 사실 시험공부를 어떻게, 왜, 그리고 무엇을 해야하는지 모르고 쳤는데 딱 그 과목에서만 유의미한 성적을 거둔 것이다. 내가 스스로 손꼽는 인생의 반등포인트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어? 이거 되네.'


이 감정이 정말 중요하다. 그 이후 시험공부란 것을 처음으로 해보았다. 범위를 잡고 집중기간을 설정하고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냉정히 평가한 다음, 최종적으로 출제자의 의도를 가늠하고 공부를 마친다. 천재형은 아니라서 마지막까지 외워지지 않은 건 끝까지 책을 보다가 덮고 시험지가 넘어오면, 그것부터 써놓고 기억력의 한계를 극복했다. 그리고 시험을 치고 나오면 다 까먹는다. 까먹는다는 표현이 너무나 적절할 정도로 며칠 지나면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랬더니, 수학도 영어도 과학도 사회도 그저 별것 아닌 과목이었다. 당연히 난 그 과목을 깊이 연구하는 연구자가 아니고 그저 정해진 범위 내에서 동일한 시간을 주고 풀어낼 수 있는 시험공부에 특화된 사람임을 분명히 한다. 중,고등학교를 거치고 대학교까지 내신과 학점을 잘 받으면서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난 분명히 '찐따'였는데 자연스럽게 친구와 자신감도 생겨 성격이 완전 변했다.


물론 난 공부하는 시간 대비 고효율을 내는 사람으로, 사고력과 응용력을 요구하는 수학능력시험에선 한계를 맛보며 전국 최상위권 성적은 내지 못했다. 아마 체계적인 공부법을 주변에서 코치해줄 수 있는 좋은 멘토가 있었다면 다른 결과를 낼 수 있었겠지만, 완전 '찐따'가 그래도 교과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꽤 성적을 내었다.


시험공부는 주변에서 조언을 받되, 그걸 수용하고 적용시키는 건 결국 본인이다. 스스로 방법을 찾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다. 그 속에서 첫 단추는 '동기부여'이다. 대단한 동기부여가 아니라도 좋다. 오히려 찌질한 편이 더 인간적이다. 모두가 정주영, 이병철은 아니며 우리는 이상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삶을 살고 있기에 매체 속 선각자의 동기부여는 고이 접어두는 편이 현명하다. 그 이후 적용된 시험에서 유의미한 성취를 일구어내보면 자연스럽게 '어? 이게 되네.'라는 희한한 감정이 생긴다. 그때부터 그건 진짜 별게 아닌 것이 된다. 우리는 '공포심과 두려심' 속에 사물과 현상을 대한다. 겪고 경험해서 몸소 체득해보며 별것이 아니라고 느끼면 그때부터는 진짜 별게 아니고 행동을 넘어, 창조와 응용까지 해낸다. 그게 '교육'에서 정말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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