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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 한잔의 여유 Feb 06. 2023

국민연금, 개혁과 고통

솔직한 심정 : 개혁은 해야 할 것 같은데 꼭 나때여야만 하는가?

220번째 에피소드이다.


'프랑스'에서 연금개혁으로 시위가 한창이다. 혁명의 나라답게, 시위도 화끈하다. 벌써 수십만명이 나와 연금개혁의 저항을 표출하고 있다. 인구피라미드로 더 큰 위기가 예정된 '대한민국'에선 슬슬 도화선에 불이 붙고 있다. 결국, 본질적인 문제는 국가 입장에서 출산률은 급격히 감소해 인구피라미드가 기형적으로 변해가지만 또 어찌나 건강한지 도대체 평균 수명은 올라가는지, 낼 사람은 줄어가는데 받아갈 사람은 많은 형국이 된다. 아찔하다 못해, 조금만 통밥을 굴러봐도 '아차! 이거 나는 평생 죽도록 내기만 하고 받을 때는 배째라고 하고 정상적으로 받지도 못하겠구나'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거... 추노해야 하나. 추노가 시급해지는 순간이다. 국민연금재정 추계는 고갈시기의 예상 년도를 끊임없이 앞당기기에 급급하다. 예상이 예상이 아니게 되었다.


결국 연금의 본질은 '사회보장제도'이다. 나는 이것이 무너지면 국가의 존재 당위성은 급격히 흔들릴 것으로 보고 있다. 왕정 국가의 압도적 권력의 시기에서, 참여와 소통이 기본이 되는 민주정으로, 그리고 공화정으로 오며 국가는 어느 순간 국민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간혹, 전쟁의 순간에서 군대의 등장이나 재난사고 등에서 소방관 또는 경찰들의 충돌할 때만 국가의 존재감이 두드러진다. 경제적으로 개방되어 외국자원이 투입되지 않는 기업, 시설을 찾기 힘들며 여행과 유학의 자유화로 대부분이 세계시민 마인드로 갖추어나가면서 국가의 경계가 급속도로 허물어지고 있다. 여기서 국민연금은 마지막 보루이다. 이 순간을 버티지 못하면, 너도나도 탈퇴를 넘어선 이민 사태를 막을 명분이 없다. 여기서 하나 드는 솔직한 심정은 '개혁은 해야 할 것 같은데 꼭 나때여야만 하는가?'라는 그저 국가에 속하지 않은 나약한 자연인으로서 가지는 이기적인 마음 뿐이다. 난 이 당면한 개혁의 책임을 온전히 국민에게 고통분담이라는 명복 하에 청구서를 들이미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왜냐하면, 이전 위정자들에게 결국 수십년 간 선출직 권력을 주었으나 인구구조의 변화를 예상치 못했거나 또는 예상했어도 변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건 국민의 탓이 아니다. '소득대체율'이란 나중의 장밋빛 미래는 추계 예상 년도가 엇나거나, 또는 세계 최저 출산률 기록을 매번 갈아키우며 예상이 빗나가는 상황에서 확신과 희망이 되지 못한다. 일부 고통분담을 하되 재정 확대를 위한 다양한 상상력이 꼭 필요하다.


가끔씩 생각하는 아젠다는 '이민자'에 개방적인 나라가 되면 어떨까 하는 바람이다. 단일민족, 한민족을 마치 자랑스러운 말하곤 하지만 실제 역사책을 뒤져본 사람은 모두 알 수 있듯이, 그건 허구에 가까우며 한편으론 그것이 설령 사실이라도 할지라도 뭐가 그렇게 자랑스러운가에 관한 근본적 질문에 봉착한다. 세계의 인구는 늘어가는데 각 나라의 인구는 줄어가는 현실은 무언가 모순적이다. 우선 권위주의에 봉착한 유교를 떨쳐내고 그 다음은 다양성을 바탕으로 포용성이 깊은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인구 구조 피라미드는 개선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조심스럽긴 하지만 국민연금 재정의 공격적 투자방식이 일부 동반될 필요가 있다. 현재의 수익률로 도저히 그 지급이 감당이 안된다면 수익률을 높일 수 있는 채널을 확보하는 게 필요하다. 물론, 맡긴 이가 국민임을 인지하고 남용하고 오용하지 않는 범위에서 동의를 구하고 그 수익률 증대를 위한 다양한 시도가 필요하다. 나는 항상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앞으로 십년 안에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세대 간의 갈등은 극으로 치닫고 안락사 문제가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말 것이다.


'이제는 살만큼 살았으니 좀 죽자' 또는 '이제는 좀 죽어줘라'라고 하는 분위기가 도래하고 각종 시위와 찬성 입법 등이 난무하고 사회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좀 더 시니컬하게 말하자면, 난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아마 '안락사' 입법이 존재한다면 나는 적극 활용하며 "잘 놀다가 간다"로 내 삶을 마무리하고 싶다. 단 나와 같은 부류가 아니라면 안락사는 '가난하고 힘 없는 자들은 본인의 죽음마저 선택을 강요당하는 사회'의 논쟁의 시작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예외조항은 반드시 생길 것이며 대부분 경제적으로 꾸준히 사회에 보탬되는 존재, 그리고 학식이 풍부하며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이들은 제외될 것이다. 나는 그러한 사회는 내 정의로움과 맞지 않다. 그런 사회가 도래한다면, '안락사'는 죽음을 선택하는 웰다잉이 아닌 태어나면서부터 삶의 마무리까지 백미터 달리기 경쟁을 지속해야하는 경주마의 채찍이다. 나는 내 삶을 살려고 태어난 것이지 삶의 끝자락에서 생존의 여부를 평가받으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국민연금의 향후 보여주는 개혁의 잣대가 느슨하거나 상상력이 부족할수록 이 시대는 가까워진다고 믿는다. 단순히 위아래로 넣었다 뺐다 하는 인구 피라미드 구조 놀이는 질린다. 수없이 외쳐댔고 십수년때 그 짓을 했지만 나아진 건 없으며 위정자들은 그것을 해결할 능력과 비전이 없다. 다시 한번 첫 질문으로 돌아간다면, '개혁은 해야 할 것 같은데 꼭 나때여야만 하는가?'라는 비겁한 자연인으로서의 불평 불만은 입속에서 수없이 맴돌지만 내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정의로운 사회가 유지될려면 단행하되, 말도 안되는 상상력 속에서 그 해결책이 제시되어야만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인구 구조 피라미드를 보면서 위에서 이만큼, 아래에서 이만큼의 논리는 단순하고 또 지루하다.


고통은 분담하되, 전적으로 책임질 힘과 용기는 전혀 없다. 분담의 타켓과 방법론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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