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6개월 후 아빠는 드디어 집(Home)으로 불안정하게 돌아왔다.
293번째 에피소드이다.
가족끼리 있는 카톡방에 우선 이실직고를 하고 시작했다. "아.. 제가 진짜 꼭 가려고 했는데 오늘 추석연휴 전 처리할 일들이 많아서 퇴원 시간에 못 맞출 것 같아요. 그래서 퇴근을 최대한 일찍하고 집에 도착할께요."라고 남겨놓고 정신없이 일에 몰두했다. 집에 도착했더니 엄마의 엄청난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이건 방어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 그저 "죄송합니다. 바빴어요."를 연신 외칠 뿐이었다. 얼마 전, 케어링 김태성 대표님을 만나뵐 일이 있었는데 이 말을 들었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무한한데, 자식의 부모에 대한 사랑은 유한하다.' 아마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정확히 적용되는 말일꺼다. 아빠는 2년6개월만에 집에 완전한 퇴원을 하였다. 다만 완전한 재활에는 끝내 실패하고 불안정한 상태로 말이다. 장애를 가지고 사는 삶은 쉽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아빠가 나에게 평생 보여준 모습은 '낙천'과 '긍정' 그 자체였다. 항상 사업이 실패한 경험이 더 많았지만 그때마다 다시 할 수 있다고 믿었고 재기하고 또 재기했다. 집 한켠엔 이미 재활 기구들이 즐비하게 늘어져있었다. 아빠는 절대 포기 할 사람이 아니다. 그냥 사람 자체가 그렇다. 이번엔 기적을 바래야하지만 또 하지 않을까?
되레 아빠의 퇴원으로 엄마가 다행이다. 재활 병원과 집, 그리고 대학(성인학습자)을 오가며 3중고를 겪었고 아무래도 병원 쪽방 침대에서 자다보니 편할 수가 없었다. 내가 최대한 간병 교대를 해주려고 했지만 직장인이기에 쉽지만은 않았다. 즉, 2년6개월 동안 병 간호, 재활을 도우면서 병원 쪽방 침대가 더 익숙해졌기에 그 모습이 미안했다. 매형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집 안방에는 기존에 쓰던 침대와 환자 침대가 동시에 놓여졌다. 엄마가 널찍한 침대에서 잠을 청할 수 있으니, 마음이 조금 놓였다. 집에 오자마자 엄마는 또 바쁘다. 집안일 정리로 여념이 없다가 나에게 추석연휴 선물로 온 박스들을 분리수거하고 오라 했다. 아까 오자마자 된통 잔소리를 들었기에 군말없이 갈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엄마가 "우리 아파트 내 헬스시설 엄마가 갈만해?"라고 묻는다. 내가 박스 분리수거 하는 김에 한번 같이 가보자고 엄마를 앞장 세웠다. 가는 길에 엄마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해댄다. 엄마가 건강해야 아빠를 오래 병 간호, 재활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운동을 꾸준히 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이었다. 아파트 입주 후 헬스시설을 처음으로 와본 엄마에게 이것,저것 가르쳐주면서 실내운동화 등을 사주겠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엄마가 병 간호로 살이 많이 빠져서 당분간 잘 먹는데 꼭 집중하자고도 했다.
앞으로 우리 가족에게 당면한 현실은 빠른 집에서의 적응이다. 불안정한듯한 안정감을 빠르게 되찾아야한다. 우선 아빠가 주어진 환경에서 빠르게 적응해서 사회인으로 복귀하는데 만전을 기해야 한다. 병원보다 호환이 맞춤은 아닌 집에서 아침에 일어나면 씻고 밥 먹고, 밖에 나갈 준비를 하고 사무실로 출근해서 하루 일과를 다 치루고 다시 복귀하고 이것이 일상이 되어야 한다. 그 가운데서 엄마의 동반자로서의 역할, 그리고 자연인 그 자체로서의 역할도 반드시 찾아야 한다. 나 역시 자녀로서, 그리고 사회인이자 자연인으로서 현재와 미래를 꾸준히 조율하고 조정해야 한다. 아빠의 퇴원으로 제1막이 내려가고 제2막이 시작되었다. 내가 이 브런치에 글을 적기 시작하면서 내 스스로를 이타적 개인주의자라고 명명하였다. 극도의 낯도 가리고 개인이 중요해서 나서는 걸 싫어했지만 내 자유와 개인을 지키기 위한 일들이 오히려 이타적으로 나타나곤 했다. 아마 이번엔 내가 또 이타적 개인주의자로서 어떤 일들을 해나갈지 기대 반 두려움 반이다. 최근, 영케어러 관련 커뮤니티 개설을 하고 본격적으로 활동에 나서고 있다. 내가 당사자이기도 하지만, 사회문제로 급속히 대두될 것이라 판단했다. 나는 내 자유와 개인을 위한 개인주의자적 일들이 또 이타적 결과로 나올 수 있다는 직감을 했다. 아무튼, 내 개인, 그리고 우리 가족들의 불안정한듯한 안정감을 가진 일상을 찾고 사회와 계속 호흡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