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이제야 잘살아 보려던 29살 늦깎이 대학생이야기
눈을 뜨고, 사랑하는 사람을 눈에 담습니다. 유니폼으로 옷을 갈아입고, 아직은 어색하기만 한 마이크 선을 옷에 연결하고 머리를 단정하게 망으로 묶습니다. 빼먹은 것은 없는지 두어 차례 가방을 확인하고, 직장으로 향합니다. 얼마 안 돼 눈에 들어오는 백화점 건물을 보며 나의 쉬는 시간이 끝났음을 확인하고 아쉬워하기도 잠시, 나의 정신없는 하루는 시작됩니다.
고객이 떠난 테이블 위 널브러진 식기류를 치우고, 테이블을 세팅하고, 음식을 나르고, 영수증을 챙겨 주문을 확인하고, 음료를 나르고, 접시를 닦고, 잠시 직원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쉬다가 다시 같은 일을 반복하는. 그러다 어느새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어 주섬주섬 집으로 돌아가는 지극히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
이런 평범함을 그리워했던 날이 있었습니다. 그저 하루하루가 평범하기만 했던 순간들에는 몰랐지만, 여느 날과 같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제는 아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사람 앞날은 한 치 앞도 모른다는 걸 제가 겪어보고서야 알아버렸으니. 그때는 이런 평범함이 어찌나 간절했는지 모릅니다.
그간 살아온 나날들은 지독하게도 외로웠고 아프기만 한 나날들이었습니다. 난 도저히 저기까지 도달할 수 없을 거라고 매 순간 확신하며 살아왔지만 결국 지금의 저는 그보다 훨씬 더 멀리 여기까지 다다랐습니다. 지나고 나면 추억이라고들 하지만, 추억이 될 수 없는 기억들도 존재합니다. 제겐 지나온 시간이 그렇습니다.
여전히 떠오를 때면 힘겹고 그만 고갤 돌려버리고 싶은 기억들 뿐이지만 다행히도 이제는 다 지나갔다는 사실이 나를 위로합니다. 앞으로 더 잘 살면 된다고, 지금 조금만 더 열심히 살아보자고 스스로 다독이며 이 악물고 살아왔습니다. 많이 뒤처진 만큼 내가 더 많이 노력하면 될 거라고.
그런데 어느 날 부정 출혈이 있었습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생리할 시기도 아니었을뿐더러 조만간 있을 여행 때문에 피임약까지 먹고 있었으니 더더욱 피가 비칠 일이 없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정기검진을 받았을 뿐이고 슬슬 결과가 나오겠다고 생각할 즈음이었죠. 그렇게 사흘 뒤 아침에 병원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진단명은 ‘저등급 편평상피내 병변’. 암으로 발전할 수 있는 암의 전 단계 같은 것이니 하루빨리 조직검사를 받으라는 말이 함께 뒤따라왔습니다.
내가 평생 건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절감한 그 순간, 이제는 내 글을 세상에 내보여야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길게만 내다보던 내 미래에 한순간 안개가 서리고, 더는 하고 싶은 일이나 좋아하는 일들을 뒤로 미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글은 그렇게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조금 힘든 나날을 지나왔고, 이제 한번 잘살아 보려던 29살 늦깎이 대학생의 이야기. 번아웃이 올 때면 수플레를 찾고,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어느 키 작은 글쟁이의 이야기.
그래서 오늘은, 내가 그렇게나 그리워했던 그런 평범한 날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