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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룸메이트

EP. 16 너도 외롭고 힘들구나

by happy daddy

#1. 나의 첫 룸메이트

말이 없는 그

지원포대에 배치 후 숙소를 배정받았다. 카투사들은 빠른 영어 습득을 위해 미군과 함께 방을 쓰는 것을 권했고(나중에 짬이 차면 혼자 쓰거나 같은 카투사끼리도 가능하긴 하다. 부대마다 상황에 따라 유동성이 있다.)

내 룸메이티는 나와 같이 이제 막 군생활을 시작한 이병(Private E-2)이었고 백인이었는데 말이 없고 조용했다. 키가 커서 185cm 정도 이상 되어 보였고 나이도 어려서 당시 만 19세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즉,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대학을 안 가고 상상도 못 할 군입대의 혜택으로 자원입대한 것 같다.

미군은 모병제이고 어마어마한 복지제도로 인해 특히 중남미계(히스패닉계)나 필리핀계 등 아직 시민권이 없는 사람들이 시민권 취득과 제대 후 취업목적 그리고 공무원 가산, 대학입학 등록금 지원, 주택 구입 지원, 건강보험 지원, 그 외 기타 등등 정말 천조국 다운 혜택을 자국 군인들에게 제공한다.


아마 이러한 이유로 입대했을 것 같은데 나이는 나보다 어리고, 말도 적고, 그리고 내가 아는 미국인들은 자신감 넘치고, 활발하고, 사교적이고, 먼저 헬로~ 하고 인사해 주고 뭐 그런 선입견이 있는데 이 친구는 정확히 그와 반대되는 성향이었다. 그래서 내가 먼저 항상 말을 걸어야 했었고 같은 방에서 지내야 하는데 적막한 경우가 많았다. 항상 말수가 없고 조용하게 서로 지내다 보니, 내가 그려왔던 미군과의 적극적인 소통으로 인한 영어 교류(?)를 기대할 수 없었다.


가끔 자다가 소리가 반대 침대에서 소리가 들리긴 했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이 친구가 훌쩍거리는 것 같았다.

아마도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소리 죽여 흐느낀 게 아닌가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이도 아직 20살도 안된 친구가 한국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고 할 정도로 이 국 만 리 낯선 땅에 와서 혹독한 겨울과 훈련을 보내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돈이 좋고, 군입대로 인해 얻는 유익이 크다 할지라도 막상 경험해 보면 자기 생각과 달라 현실과 상상의 괴리로 인해 많이 고달팠을 것이다.


더군다나 말수도 적고, 술도 안 하는 것 같고, 사교성도 적어 그러한 외로움을 적극적으로 풀지도 못했을 것이다. 또 말도 잘 안 통하는 한국인과 같은 공간에서 지내는 것도 어려움에 한몫했을 것이다.


내 코가 석자였지만 이 백인 친구가 참 걱정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룸메이트 되고 나서 3개월쯤 후 이 친구가 다시 미국에 간다고 한다.

보통 미군 같은 경우 해외파병을 하면 1년 정도 근무하고 재연장도 가능하지만 이 친구는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나중에 같은 미군 동료에게 물어보니 돌아온 대답이 homesick 이란다. 내 예상이 맞았다.



그렇게 나의 첫 룸메이트는 짧은 한국 생활을 마무리하고 가족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 동두천 시장에 가다.

필요한 것들 사 오기

자대에서 배치 후 주말이라 선임들이 첫 외출을 시켜줬다. 한국군과 달리 외출은 사전허가를 받지 않고 위수지역 안에서 근무 후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었다. 한 겨울의 동두천 시내는 춥고 쓸씁했다. 그래도 모처럼 캠프를 벗어나 사제공기를 맛보고 동기들과 같이 나오니 상쾌한 마음으로 외출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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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외출 때 주로 배럭스 안에서 필요한 것들을 사 와야 하는데 물론 캠프 안에 PX도 있고 미군 AAFES도 있지만 제한이 있고 한국인들은 못 사는 것도 많고 달러로 계산해야 해서 주로 시내 마트에 가서 생필품을 사 온다.


배럭스 안에는 lundry room이라고 세탁기와 건조기(당시 우리 집에도 없었던 건조기를 군대에서 보고 많이 신기했던 경험이 있다. 반대로 세탁기와 건조기가 세트로 있으니 장마가 있어도 폭설이 내려도 언제든지 빨래하고 건조할 수 있어서 어떻게 보면 훈련이나 다른 것들은 더 힘들게 돌아간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선임들이 무엇을 사야 할지 알려주고 또 군복의 계급도 오버로크 맡기고 (캠프 내에도 세탁소가 있어 계급장에 오버로크 치지만 얇게 쳐서 튼튼하지 않아 외부에서 해온다. 물론 캠프, 외부 모두 유료이다. 미군이 직업군인이다 보니 세탁소, 이발, 미용소 전부 유료로 지급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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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추운 겨울이나 장갑도 사라 권했고 비니 모자도(PT 할 때 필요) 추가로 사는 게 좋다고 해서 이것저것

산 기억이 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게 지갑이다. 지갑은 신분증을 보관하고 목걸이 형태인데 캠프 내 출입을 하거나 신분을 드러낼 때 지갑에 보관하면 편하고 주로 목걸이 형태의 밸크로 제품을 산다. (일명 찍찍이 지갑, 값도 비싸지 않아 가성비 만점이고 미군들도 많이 이용을 한다.)

지갑의 구성은 단순하다.

한쪽에는 투명한 판막이가 있어 거기에 신분증

(ID Card)를 둔다. 양쪽에 끈이 있어 목에 걸면 잃어 버릴 염려가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러번 ID Card를 분실하여 그때마다 곤란을 한두번 겪은게 아니다. 어쩌면 시쳇말로 고문관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인데 이상하게 잘 잃어버렸다.


3번째인가 분실했을 때는 아예 캠프 내 ID카드 신청, 제작 부서로 직접 찾아가 (대대 인사과에 챙피해서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직접 가서 접수, 신청, 발부 받음.) 발급 받았고 나올 때 까지는 외출도 못하고 영내 대기해야 했었다.




한번 쇼핑을 갔다 오니 모아둔 용돈이 다 없어졌다. 25년 기준으로 이병 월급이 75만 원, 병장 150만 원이라 한다. 육군을 기준으로 18개월 복무 시 약 3,000만 원 정도의 급여를 받는다 한다. 물론 군복무로 인해 시간을 나라에 바치고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주는 것이지만 이것도 최저시급에 비하면 적을지 몰라도 30년 비교하면 정말 어머어마한 금액 같다. 이런 걸 '상전벽해'라고 해야 하나?


내 바로 윗 선임이 한 달 용돈으로 부모님께 30만 원 받는다 하셨는데 그것도 본인은 쓸게 없다(?) 망언처럼 들렸는데, 논산 훈련소에서는 그렇게 나갈 돈이 없었는데 자대 배치 되고 나니 생활에 필요한 생필품을 사다 보니(2주마다? 1 달마다 보급품이 나오는데 비누, 칫솔, 면도기, 구두약은 나오지만, 세제는 안 나온다. 그런데 또 샴푸는 준다....... 빨래는 내가 알아서 하고 머리 감는 것은 지원해 준다?)


침대생활을 하는데 물론 모포가 지급되지만 99%가 사제 침구류를 쓰고 나 역시 선임들이 물려준 호랑이 무늬가 사제 침구류를 받아 그걸로 사용했는데 확실히 촉감은 더 부드럽고 좋았다.


첫 주말이고, 첫 외출 그리고 이것저것 생필품도 사고 선임과 함께 나가니 어떻게 나갔다 왔는지도 모르고 또 게이트까지 명진버스를 타고 가야 해서 처음에는 어디서 내려야 할지도 몰라서 정말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또 선임들의 도움으로 하나하나씩 배우게 되고 또 든든한 동기 4명이 있어 언제나 든든했다.


곧 있으면 집으로 휴가를 가기 때문에 처음부터 많이 사지 말라고 해서 필요한 것만 사고 또 시내구경도 하고

그렇게 돌아오다 보니 저녁 9시가 되었다. 미군은 일과 시간 이후 지나면 잠깐 분대별로 formation 해서 공지사항 알려주고 특별한 일 없으면 그걸로 끝난다. 또 아직 휴가 전이라 사복이 없어서 PT복으로 입고 나왔는데 그것만 봐도 딱 신병티가 난다. 선임들은 이미 자기 옷(군복이 아닌 사제 ㅋㅋㅋ)을 입고 외출하고 미군들도 근무 후 편한 복장으로 시간을 보내고 (짐, 도서관, 펍, 영화관, 기타 등등) 있어서 일과 시간 지나면 자유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겪어서 알게 됐는데 그 자유에는 정말 책임이 따르고 그 책임을 성실히 수행한다는 것이다.


다행히 주일에는 동두천 시내의 교회를 가기로 했고 아침 점호도 없어 늦잠도 잘 수 있어서 긴장도 풀리고 기분은 더 풀렸다. 또 다른 새로운 경험들이 눈앞에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와 설렘이 또 한가득 채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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