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영화평론가 홍수정
Jul 17. 2024
영화 글쓰기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영화에 관한 글을 각자 써 온 다음 함께 읽고 이야기한다. 다른 모임에 비하면 부담이 있는 편이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또 운이 좋게도 이 모임은 끊이지 않고 이어지며 참석자들은 왜 인지 모르겠으나 마음 담아 글을 써온다. 그 모습에 잔잔한 기쁨을 느끼면서도 궁금해진다. 자진하여 의무 없는 괴로움을 짊어지게 만드는 글쓰기란 무엇일까?
AI라는 것이 나타나며 최근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되는 활동은 무엇일까? 인간만의 고유한 것이라고 착각해 왔지만, AI가 가뿐하게 따라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냐고. 글쓰기는 가장 먼저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나는 여기 동의하면서 부동의한다. 기계가 손쉽게 쓸 수 있는 글은 많다. 하지만 어떤 글은 기계가 구현하는 순간 가치가 없다. 영화에 대한 글도 그렇다. 그것을 쓰는 것은 영화를 보고 난 후 내 안에서 요동치는 생각과 감정의 편린을 모아 의미 있는 조각으로 엮어내는 활동이지, 기계가 대체할 노동은 아니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저 사람 내부의 밑바닥에서 건져 올린 뜨끈뜨끈한 언어이지, 그것을 흉내 낸 텍스트가 아니다. 로봇 발레리나의 완벽한 턴을 본다 하여 우리는 과연 감격할 것인가. 어떤 글쓰기는 사람이 할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반대로 사람에게도 글쓰기는 특별하다. 그것의 의미는 이상이 아니라 현실에 있다. 글쓰기는 잘 가꾼 정원이나 몽실한 구름 위가 아니라 먼지가 굴러다니는 책상, 내 방의 누런 장판 혹은 이불이 구겨진 침대 위에서 이뤄진다. 그러므로 쓰는 일은 숭고한 작업이 아니라 질척이는 본능에 가깝다.
모두들 일분일초를 유의미하게 사용하며 성공하기 위해 무한경쟁하는 시대에서 글쓰기는 우리의 현실을 위로 끌어올리기는커녕 너절한 아래로 끌어내린다. 글은 나의 하루를 우아하게 바꿔주기는커녕 힘겹고 치졸하게, 때로 무의미하게 바꾸어놓는다. 당신은 글쓰기의 멋진 이미지에 속았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욕을 하면서도 다시 찾는 애인처럼, 이 시간이 무용해지고 내게 의미 없는 얼룩으로 남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끝내 다시 감행하게 된다. 하얀 종이 만을 앞에 두고 생각 사이를 이리저리 탐험하며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다 끝내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을 때의 희열은 인생을 걸게 만들기 때문이다.
글쓰기 스킬을 연마하는 것은 내 삶을 조금 편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또 글쟁이로 살다 보면 어느 날에는 달달한 부스러기를 입에 넣는 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인생에서 할 수 있는 여러 전략적인 작업에 비한다면 글쓰기는 비효율적이며 어떤 성취도 보장해 주지 못한다. 이해타산을 따지자면 그것은 여실히 손해로 점철될 활동이다. 하지만 맞잡은 손이 하루를 회복하는 것처럼, 삶은 이토록 쓸모 없는 순간들로 구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