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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Apr 11. 2018

그 저주를 피할 수 있을까, <팬텀 스레드>

영화 비평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글에 인용하는 대사들은 기억상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폴 토마스 앤더슨(이하 'PTA')에게 서로를 야욕 하는 지배관계는 흔한 일이다. 아니, 도리어 그런 관계가 등장하지 않는 작품을 찾기가 더욱 어렵다. 그 관계는 언뜻 보아 한쪽의 우세인 듯 보이나, 늘 서로를 향해 엎치락뒤치락 대며 꿈틀댄다. <마스터>(2012)를 떠올려보자. 랭케스터(필립 세이모어 호프만)는 프레디 퀠(호아킨 피닉스)을 지배하는 듯 보이지만 그를 따라 독주를 들이켜고 잔디에 뒹군다. <데어 윌 비 블러드>(2007)의 다니엘 플레인 뷰(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목사 선데이(폴 다노)에 대하여 승리한 듯 보이지만, 그의 머리를 휘어잡고 흔들던 선데이를 생각할 때 누가 이들의 관계를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까.

<팬텀 스레드>(2017)도 마찬가지다. 뮤즈를 움켜쥔 디자이너와 서서히 그를 지배하는 여인. 수동적으로 보였던 알마(빅키 크리앱스)가 레이놀즈 우드콕(다니엘 데이 루이스)에 대하여 거두는 승리는 이미 많이 거론되었다. 연인을 자기 방식대로 사랑하겠다는 선언, 프러포즈를 받자 한번 더 자기 입으로 결혼해달라 제안하는 모습, 나를 향해 부드럽고 무기력하게 쓰러지라는 명령까지. 저 위에 사진에서조차 거울에 비친 알마는 우드콕을 또렷하게 응시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어쩐지 마지막에 이르러 드러나는 알마의 패배에 대해서는 별로 거론되지 않는 것 같다. 내가 이 영화에서 주목하는 것은 알마가 연인을 자기 품 안에 취하기 위하여 끝내 희생하고 패배하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 레이놀즈의 승리.


죽음의 가까이에 존재하는 레이놀즈

먼저 팬텀 하우스의 성격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영화는 레이놀즈의 집을 소개하며 시작된다. 줄 지어 선 여인들이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갈 때, 카메라는 그들을 따라 고개를 들어 눈부신 빛이 발산되는 천장을 본다. 빛을 향해 가는 여자들의 검은 실루엣은 마치 하늘로 올라가는 영혼의 모습처럼 보인다. 이 집의 2층은 어딘가 묘한 느낌을 준다. 공방에서 흰 옷을 입은 레이놀즈가 흰 옷의 여자들 사이에서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만질 때, 이곳은 마치 죽은 자를 위한 연회장처럼 보인다. 경직된 백색의 방은 후에 등장하는 색색의 파티장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레이놀즈는 집에서 죽음의 냄새가 난다며 인상을 쓴다.


그러나 레이놀즈도 크게 다르지 않다. 깡마른 몸, 조금의 소음도 용납치 않는 예민함. 레이놀즈의 곁에는 늘 죽음의 공기가 감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그는 마치 자신의 생명과 예술적 재능을 맞바꾼 유령 디자이너처럼 보인다. 그는 생명의 특성 중 하나인 성욕마저 없으며 성이 우드콕(나무 성기)이다. 예술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레이놀즈는 '예술' 그 자체의 화신과도 같다. 인상 깊은 장면이 있다. 레이놀즈가 처음으로 버섯 우린 물을 마셨을 때 그는 괴로워하며 방에서 계단으로, 공간 이동을 하듯 순식간에 이동한다. 알마가 파티장에 간 후에도 그는 책상에서 문 앞으로 점프컷을 통해 이동한다. 영화에서 오직 레이놀즈만이 이런 방식으로 이동하는데, 이런 갑작스러운 이동과 출몰은 유령의 속성을 닮았다.


그를 감도는 짙은 죽음의 공기는 그의 어머니와 관계가 있다. 우드콕의 깊은 예술성은 어머니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가 처음으로 만든 옷은 어머니의 웨딩드레스이며, 그녀는 이 옷을 입고 떠나갔다. 그때부터 레이놀즈는 드레스를 만드는 자에 관한 저주, 사랑하는 사람과 반드시 이별하는 예술가에 관한 저주에 시달린다. 그럼에도 그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소중히 간직한다. 그는 죽은 자가 지켜본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말한다. 레이놀즈는 저주를 지독히도 싫어하지만 그 저주가 예술성의 원천임을 알고 있다. 그에게 예술, 어머니, 그리고 죽음은 모두 하나다.


레이놀즈의 여자들, 그리고 알마

레이놀즈 주변에는 세 명의 여자가 있다. 엄마, 시릴, 알마가 그들이다. 엄마는 앞서 말했듯 죽음과 결합되어 예술성의 원천이 된다. 시릴은 레이놀즈에게 '규칙'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시릴은 레이놀즈에게 차를 마실 때, 여자와 헤어질 때를 알려준다. 레이놀즈는 그녀의 말이 항상 옳다고 믿는다. 시릴은 레이놀즈가 쓰러졌다는 말을 듣고서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는 마치 '레이놀즈는 쓰러져선 안된다'는 규칙을 말하는 것만 같다.  


인상적인 것은 알마다. 알마의 자리는 늘 새로운 여자들로 교체되는 자리다. 레이놀즈는 이 자리에 아름다운 여자들을 초대하여 잠시 영감을 얻고, 그 관계의 생명이 다하면 그녀들을 떠나보낸다. 레이놀즈에게 하나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창작에 필요한 생기, 생명의 활기다. 그는 끊임없는 뮤즈와의 만남을 통하여 그 원동력을 얻는다. 죽음의 가장자리 위치하며, 타인의 기운을 통하여 예술적 수명을 이어가는 것이다. 이 착취적인 관계는 끊임없이 반복되며 공허하게 이어져 온 것 같다.


그런 그에게 알마가 왔다. 생의 기운이 넘쳐흐르는 알마. 그녀는 곧잘 우당탕 하는 소리를 내고, 지방이 잔뜩 들은 버터로 음식을 조리하며, 두 볼에 붉은 홍조를 띤다. 나이 든 여자는 레이놀즈에게 알마의 흉을 보며 "쟤네 인종은 괴상한 풍습이 있다더군요. 밤만 되면 뭔가 한다던데"하고 말하고, 다음 장면에서 알마는 춤을 추고 싶다고 말한다. 밤에도 몸을 흔들고픈 생기발랄한 알마는 그들에게 전혀 다른 인종처럼 보인다. 시릴이 처음 알마를 보았을 때, 그녀는 알마의 몸 깊숙이 코를 대고서 알마의 향기를 맡는다 (이 모습은 향기를 흡입하는 형상이며 꽤나 착취적이다). 시릴은 레이놀즈에게 "알마를 유령 취급해도 되지만, 시들게는 하지 마"라고 말한다. 이 말은 남매의 기괴한 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곳에서 죽음은 친근하며, 생기는 신하다.   


레이놀즈는 알마와 함께 있을 때 사람다운 모습을 보인다. 혼자 있을 때 유령처럼 이동하던 그는 알마와 함께 두 발로 뚜벅뚜벅 걷는다. 알마를 보자마자 허기를 느끼고 음식을 잔뜩 주문하기도 한다. 시릴은 알마가 레이놀즈의 이상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도 착취적인 것은 마찬가지다. 알마가 자신을 고양시킬 때 레이놀즈는 돌아서서 작업을 생각한다. 자신이 받은 충만한 사랑을 알마에게 돌려주지 않고 작업의 원동력으로 소비하는 것이다. 알마는 이 집의 괴상한 규칙에 위축되어 간다. 자신의 모든 조각을 내어주어도 그의 조각 하나 갖지 못하는 이상한 규칙.


레이놀즈의 저주를 이해하는 알마

그러나 알마는 레이놀즈가 여태껏 만나온 뮤즈들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오로지 그녀만이 레이놀즈를 짓누르는 저주의 무게를 이해한다.


레이놀즈는 로즈 여사를 특히 싫어한다. 그녀는 유난히 부산스러우며 자신이 못생겼다고 울먹인다. 이 모든 면이 레이놀즈의 심기를 거슬렀을 것이다. 그러나 로즈의 유별남은 그녀의 활력에서 온다. 그녀는 땀을 뻘뻘 흘리고, 동작도 크며, (레이놀즈가 못한) 결혼을 두 번이나 한다. 그녀는 자신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간임을 온몸으로 우악스럽게 드러다. 로즈가 드레스를 입는 모습은 다른 여자들과 다르다. 영화에 등장한 첫 손님은 불편한 드레스에 몸을 맞추며 조심히 걸었다. 그러나 로즈는 레이놀즈의 옷을 마구 구기며 그의 옷이 살아있는 인간에게 불편함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드레스가 가진 단정한 아름다움이 실은 죽음에 가까운 것임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이다. 마침내 로즈가 기절했을 때, 이 광경은 마치 드레스의 저주를 온 세상에 공표하는 것처럼 보인다. 알마는 정확히 이 지점에서 가장 분노한다. 그녀는 당신의 옷을 입을 자격이 없어요. 이 비난은 아름다움을 위하여 죽음의 기운을 감내하지 못하는 로즈의 태도에 대한 것이 아닐까. 알마는 기절한 로즈에게서 옷을 되찾아 온다. 이것은 단순히 교양 없는 고객에 대한 행동으로 보기에 다소 과하다. 알마는 저주의 무게에 짓눌린 레이놀즈의 상처를 이해하며, 로즈를 비난하는 방식으로 레이놀즈를 위로한다. 로즈가 형편없는 여자일 뿐, 당신에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이다. 레이놀즈는 행복한 표정으로 알마에게 키스를 퍼붓는다.


그러나 다음 장면에서 레이놀즈는 시릴에게 어머니의 드레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알마는 또다시 묘하게 소외된다. 그를 위로하려는 알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들 사이의 관계의 기울기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를 나의 방식대로 사랑하겠어요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발생한다. 알마와 모든 면에서 다른 공주가 등장한다. 그녀는 인형같이 이쁘고 섬세한 취향을 가졌으며 높은 신분의 여성이다. 레이놀즈와 공주가 다정히 대화를 나눌 때, 알마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바라본다. 그녀는 홀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공주에게 뚜벅뚜벅 다가서서 "저는 이 집에 살아요"라고 말하는 알마에게서 일렁이는 욕망이 느껴진다. 이때를 기점으로 알마는 레이놀즈를 독점하기 위하여 움직이기 시작한다.


생각해보면 레이놀즈와 알마의 관계는 늘 질투를 원동력 삼아 움직였다. 식당에서 두 여자가 레이놀즈에게 다가와서 그의 드레스를 입고 죽고 싶다는 섬뜩한 말을 전할 때, 알마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스쳐간다. 레이놀즈 역시 마찬가지다. 로버트 하디 박사가 알마와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눌 때, 레이놀즈는 그들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본다. 두 남녀 사이를 흐르는 성적 긴장감은 서사와 전혀 무관하다. 이때 하디 박사는 오로지 레이놀즈의 질투를 유발하기 위하여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알마가 어린 남자와 (레이놀즈는 하디 박사를 "boy"라고 칭한다) 즐겁게 어울리는 광경은 레이놀즈의 신경을 자극한다. 이후 하디와 알마의 묘한 관계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고 잊혀진다. 이 세계에서 사랑과 독점욕은 같은 말이다.   


그 후 알마는 레이놀즈에게 자신의 방식대로 저녁을 대접한다. 그녀는 아마도 괴상한 규칙을 무너뜨리고 레이놀즈를 자신의 세계로 이끌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도전은 처참하게 실패한다. 이 비극의 원인은 레이놀즈가 가진 모순성에 있다. 그는 생기를 갈구하는 동시에 그것을 멸시한다. 그는 삶의 활기를 영감으로서 소비하길 원할 뿐, 그것이 자신의 삶을 침범하면 참지 못한다. 버터에 절은 아스파라거스를 대하는 레이놀즈의 태도에는 거만한 혐오가 엿보인다. 알마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당신의 규칙을 치우라고 소리치고, 레이놀즈는 나를 죽이려는 거냐고 반문한다. 레이놀즈에게 규칙은 목숨과 같다. 철저히 죽음의 세계에 머물기를 바라는 남자. 그녀는 레이놀즈를 규칙 밖으로 이끌고 나오는 일이 완전히 불가능함을 깨닫는다. 아마도 이때였을 것이다. 알마는 레이놀즈를 가지기 위하여 무서운 결심을 한다. 게임을 그만두지 못할 바에 그 안에서 철저히 이겨주겠다는 다짐일까. 알마는 레이놀즈의 게임 속으로 몸을 던진다.


레이놀즈의 게임을 주도하는 알마

알마가 레이놀즈의 게임을 주도하는 방식은 죽음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녀는 독버섯을 레이놀즈에게 먹이고, 그는 무기력하게 쓰러진다. 레이놀즈가 처음 쓰러지던 장면을 회상해보자. 레이놀즈는 방 가운데에서 유령처럼 휘청대다, 드레스가 못생겼다는 말을 남기고 쓰러진다. 이 순간은 레이놀즈의 패배(기절)와 예술의 패배(못생겼음)를 동시에 드러낸다. 레이놀즈, 예술, 아름다움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다.


다음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장면 중 하나다. 누워있는 레이놀즈의 방 한편에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이때 방문을 열고 알마가 들어온다. 일반적인 영화의 작법 상 제3자가 방에 들어오면 주인공에게 보이던 유령은 홀연히 사라진다. 유령은 그에게만 보이는 환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알마는 당황스럽게도 레이놀즈와 유령이 있는 방 한가운데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온다. 이것은 알마가 레이놀즈를 감도는 죽음의 기운을 물리친 것이 아니라, 그 안으로 깊숙이 들어왔음을 보여준다. 그녀는 레이놀즈의 곁에 가기 위하여 죽음의 언저리로 다가오고 있다. 레이놀즈가 어머니를 향하여 던진 마지막 말은 "지금 여기 있나요? 대답 좀 해주세"다. 다음 순간 알마가 그에게 다가와 머리를 짚으며 안부를 묻는다. 어머니를 향한 질문에 알마가 응답한다. 그녀가 어머니의 자리에 앉으며, 죽음의 세계로 깊숙이 들어왔음을 보여주는 순간이다.   


자신을 향하여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는 곳까지 깊숙이 방문한 사람은 알마가 처음이었나 보다. 레이놀즈는 이 사건을 계기로 알마에게 청혼을 한다. 그러나 결혼 후 함께 간 여행에서 관계는 다시 제자리를 찾아간다. 레이놀즈는 알마의 부산함에 인상을 쓴다. 음식을 먹는 소리, 활발하게 움직이는 모양새는 모두 레이놀즈에게 매력적이지 않다. 그는 확실히 알마의 생기보다, 순간 감돌던 죽음의 기운 (혹은 그녀에게서 느껴지던 어머니의 기운)에 결혼을 결심했던 것 같다. 생과 사의 기운은 결코 합일되지 못하고 서로의 주위를 맴돈다.

 

다음 장면 역시 인상적이다. 레이놀즈와 알마는 앉아서 게임을 하고 있다. 알마가 4칸을 움직이자 레이놀즈는 3이 나왔는데 어째서 한 칸 더 움직이느냐는 말을 한다. 이 말은 마치 네가 노력한 이상의 친밀함을 내게 바라지 말라는 은근한 경고처럼 들린다. 게임에서 진 알마에게 레이놀즈는 "나처럼 이기면 게임이 재밌다"고 말한다. 레이놀즈와의 결혼에 성공했지만 알마는 여전히 그와의 게임에서 완전히 승리하지 못하고 있다.


레이놀즈는 마침내 알마를 내쫓을 생각을 한다. 다가오는 패배의 기운에 그녀는 마지막 승부수를 던진다. 더 많은 독버섯을 넣은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다. 이 장면은 알마가 레이놀즈를 처음 만나 서빙을 하던 장면과 대비를 이룬다. 빛이 가득한 공간에서 생을 서빙하던 그녀는 이제 어두운 공간에서 죽음을 서빙한다. 레이놀즈는 음식을 먹는다. 이 장면은 알마가 레이놀즈에게 버터에 절인 아스파라거스를 대접하던 장면과도 겹쳐진다. 그때 음식을 밀어내던 레이놀즈가 이번에는 왜 기꺼이 음식을 삼킬까. 차이는 독버섯에 있다. 그가 버터에 절인 독버섯을 삼키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을 죽음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며, 그가 죽음에 매료된 자이기 때문이다. 레이놀즈는 게임의 속성을 간파하고 주도하는 알마의 모습에 무력하게 쓰러진다. 레이놀즈의 패배, 그리고 알마의 승리.


마지막에 드러난 알마의 패배

그렇다면 알마는 마냥 승리한 것일까. 그녀에게서 감지되는 변화들이 있다. 그녀가 처음과 비교하여 죽음에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보자. 그녀는 레이놀즈와 엄마의 사이, 영혼의 공간과도 같은 그곳에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며, 치사량의 독버섯을 조리한다. 레이놀즈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다. 무도회장에서의 장면을 기억해보자. 알마는 처음 영화에 등장했을 때부터 넘어질 듯 덜렁대며 걸었다. 그랬던 그녀는 이제 자기 옆에 무언가가 무너질 듯 하자, 화들짝 놀라며 몸을 피한다. 레이놀즈가 알마를 찾았을 때 그녀는 한쪽 벽에 붙어 가만히 서 있다. 그녀의 모습은 레이놀즈 얼마간 닮았다. 재밌는 것은 레이놀즈도 알마를 닮아간다는 것이다. 알마를 내쫓아야 한다는 말을 알마가 엿듣는다. 그녀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시릴과 예의 바른 대화를 나눈다. 레이놀즈는 두 사람이 서로 잘 통한다며 역정을 내는데, 이때 감정을 터뜨리는 그의 모습은 알마와도 닮았다. 레이놀즈는 알 얼마나 가까워졌나. 반대로 알마는 죽음을 향하여 얼마큼 다가선 것일까. 그 거리를 명확히 측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모호한 거리만큼, 그녀를 잠식한 어둠의 크기만큼 알마는 게임에서 패배하였다.  


드레스의 저주

영화의 초반에 레이놀즈는 알마에게 드레스의 저주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들은 화롯가 앞에 앉아 있다. 이 구도는 알마가 의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에서 똑같이 반복된다. 그리고 알마의 이야기가 곧 영화의 전체를 이룬다. <팬텀 스레드>는 PTA가 관객에게 들려주는 예술가의 저주에 관한 이야기라고 보아도 좋을까.


레이놀즈는 끊임없이 저주로부터 벗어나길 원하지만 엄마도, 공주도, 그의 옷을 입은 여자들은 모두 곁을 떠나간다. 저주와 싸우며 그의 곁에 남기 위하여 무던히도 애쓴 유일한 여자, 알마는 그의 곁에 남은 대신 함께 죽음에 잠식되어 간다. 이들의 마지막을 두고 레이놀즈가 저주를 피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예술에 영혼을 사로잡힌 아티스트는 죽음 벗어날 수도, 삶의 활력 속에서 온전히 사랑할 수 없다는 PTA의 지독한 낙담은 아닌가.


영화의 마지막, 알마는 상상을 한다. 레이놀즈의 아이를 낳고, 그와 함께 햇볕 가득한 산책길을 걷는 상상. 그러나 다음 순간 레이놀즈의 목소리가 들며, 그들이 여전히 컴컴한 방에 있음을 알게 된다. 곧 스크립트가 오르며 레이놀즈와 알마의 모습이 오랫동안 보인다. 그들은 함께 달빛을 맞으며 드레스를 만지고 있다. 이 장면은 아름다운 동시에 몽환적이다. 여태껏 영화에서 본 풍경을 생각할 때, 그들의 미래는 알마의 상상보다는 이 마지막 장면에 가까울 것이다. 그들에게 건강한 삶은 환상이며, 몽환적 이미지는 현실이다. 이것이야말로 삶에 발 붙이지 못하고 떠도는 아름다운 유령들의 모습이 아닐까.


<팬텀 스레드>와 PTA

<팬텀 스레드>를 보고서 어쩔 수 없이 영화에 대한 생각을 했다. 영화는 두 시간 동안 아름다운 이미지를 선사하고, 마지막에는 극장 가득한 어둠 속에서 관객들을 떠나보낸다. 영화의 운명은 드레스에 관한 레이놀즈의 저주와 얼마나 다를까. 영화는 스텝, 연기자, 감독과 주변인들의 헌신으로 완성된다. 어쩌면 영화는 태생적으로 그것을 사랑하는 자들의 생기를 먹고 자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과정은 레이놀즈가 드레스를 완성하는 과정과 얼마나 다른가. <팬텀 스레드>를 끝으로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은퇴를 선언했다. 우리는 혼신의 연기를 담은 작품의 탄생과 아티스트의 부재를 동시에 맞게 된 셈이다. <팬텀 스레드>가 더욱 아프게 다가오는 까닭이다. 


마지막에 알마가 파티장을 상상할 때, 그곳은 예전과 달리 텅 비어 있다. 그 어색한 공백은 파티장을 가득 매웠던 사람들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PTA는 늘 팽팽한 긴장과 에너지가 가득한 작품을 만들어 왔다. 그는 <팬텀 스레드>에 이르러 문득 영화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를 지켜본다. 끊임없이 생성되는 공백,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공허.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 <팬텀 스레드>는 PTA의 필모에서 유례없이 낙심하는 작품이다. 흘러넘치는 우울과 공허를 그는 숨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레이놀즈의 마지막 말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우린 여기 있어. 나는 배가 고파. 계속해서 허기를 채워야 하는 것이 예술가에게 주어진 형벌이라면, 지금 그의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위안이다. 이것은 레이놀즈가 엄마의 유령을 향하여 묻던 "지금 여기 있나요?"에 대한 스스로의 대답이기도 하다. 그것은 현실을 포장하지도, 연대감을 과시하지도 않는 적당한 위로의 언어로 다가온다.

결국 저 두 문장이 영화가 내내 이야기한 예술적 진실의 양면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팬텀 스레드>는 삶에 대한 영구한 갈증에 시달리는 예술가와 "지금, 여기"에 함께 하는 사람들에 대한 영화다. 이 감당하기 힘든 진실이 아프다 한들, 누가 그것이 아름답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레이놀즈와 알마를 비추는 마지막 장에서 지독한 저주를 감당하는 이들에 대한 PTA의 애이 엿보인. 같은 시선으로 그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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