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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Jan 15. 2019

나를 압도한 걸작, <흔적없는 삶>

※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데브라 그래닉의 <흔적없는 삶>(2018)은 많은 평자들의 2018 베스트에 오르며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는 극장에 오르지 않고 바로 2차 시장인 네이버에 풀렸다. 과연 얼마나 좋을지 궁금해하며 관람해 보았다.


이 영화 뭐지. 처음 봤을 때 든 생각이다. 나는 완전히 압도당했다. 작년 한 해 좋은 영화는 많았으나 나를 이 정도로 압도한 영화는 없었다. 혹시나 해서 다시 보니 더 좋았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브런치에 끄적인다.


영화의 절반은 숲이다. <흔적없는 삶>의 숲은 관객에게 말을 걸어온다. 아니, 눈부신 존재감을 뿜어낸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거대한 숲을 한눈에 담을 수 없다. 영화가 그런 방식으로, 숲을 축소해서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영화는 주인공 거주하는 거대한 숲의 일부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푸른 숲의 생명력은 너무도 왕성하여 매일 부녀의 흔적을 덮는 것만 같다.     


영화의 나머지 절반은 아빠와 딸의 이야기다. 영화가 시작되면 나무 사이에 걸린 거미줄이 보인다. 아버지가 바란 삶도 그런 삶이었을 것이다. 숲 속 거미줄처럼 보일 듯 말 듯 한 삶. 그는 끊임없이 흔적을 지운다. 그런 기이한 습성의 명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으며, 영화도 이를 설명하는 일에 무관심하다. 대신 우리는 지금 여기서 필사적으로 자 방식대로 삶을 이어가는 한 남자를 지켜보게 된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딸이 있다. 사실 정말 딸이 맞는지도 확실히 알 수는 없다. 어떤 관계인지를 묻는 트럭운전수의 의심은 관객의 그것과 공유다. 영화의 초반, 아빠의 방식대로 삶을 살던 그녀는 사람과 접촉하며 서서히 변화한다. 그녀는 삶에 흔적을 남기고 싶어한다. 장을 봐오기도 하고, 거주할 공간을 임대한다. 그녀는 집주인에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적은 비용의 임대료라도 내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한다. 그녀가 건네는 지폐는 단순한 임대료를 넘어 세상에 처음으로 새기는 흔적이다.   

                            

딸이 아빠에게 벌을 만지는 법을 알려주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 중 하나다. 벌들은 작은 벌통에서 자신들의 사회를 만들어 살아간다. 딸은 아빠에게 모여사는 삶의 온기를 전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장면조차 서사에 중층 되지 않고 사라진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삶답게.


이들의 관계는 가족이자 동료이며 어딘가 연인 같기도 하고, 어쩌면 태초의 두 인류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그 관계를 하나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대신 우리는 서로에게 기대는 그들의 모습을 하염없이 보게 된다. 아빠가 자신의 배에 딸의 언 발을 대고 녹이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언 발과 따듯한 배. 그 극단적인 감촉의 차이가 나에게도 짜릿하게 전해오는 듯하다. 이 장면은 감촉의 차이로 이들의 관계의 깊이를 전달하는 동시에, 이들이 각자 느끼는 숲에 대한 상이한 감각을 전달한다. 아빠에게 숲은 따듯한 안식처이지만, 딸에게 숲은 언 땅이다.   


결국 이들은 헤어지게 된다. 영화는 산에 음식을 두며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딸과, 어디론가 사라지고 만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데브라 그래닉은 <윈터스 본>(2010)에 이어 딸에 대한 아버지 삶의 전승과 그 거부의 테마를 다루고 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후에 다른 글을 통해서 전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 영화를 걸작이라 생각하는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것들이 서로 신비롭게 어우러지며 존재감을 뿜어내기 때문이다. 왕성한 생명력이 흘러넘치는 생소한 숲, 먹고 걷고 이동하는 활동의 활기, 부녀라고 불리는 두 남녀의 이상한 관계, 그것의 느린 균열과 분리. 이 기이한 작품에 나는 여전히 후유증을 앓는 중이다.


누군가는 이 영화가 지루하다고 느낄 수 있다. 또한 누군가의 걸작이 누군가의 범작, 혹은 졸작일 수 있음도 당연하다. 그러나 적어도 내게 이 영화는 신비롭고 새로운 감각을 열어젖힌 작품이다. 두 말할 것 없는 걸작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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