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에서 운영하는 '스브스 프리미엄'에 기고한 글입니다
요즘 극장가에 특이한 기운이 감돈다. 마치 낯선 안개가 틈입해 어느샌가 마을을 덮친 것처럼. 그 기류는 가까이에서 감지되지 않지만, 한 발짝 뒤에서 보았을 때 비로소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2024년 7월의 셋째 주, 장마를 맞은 한국에는 이런 영화가 인기다. <탈주>,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 <인사이드 아웃 2>, <핸섬가이즈>, 그리고 <하이재킹>. 그런데 이 중에서 <인사이드 아웃 2>와 <핸섬가이즈>를 제외한 세 편의 영화에는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모두 한국 영화이며, 비슷한 시기에 개봉해 여름 관객에게 선택받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결정적인 공통점이 있다. 바로 '생존'을 향해 달려가는 영화라는 점이다.
<탈주>는 북한을 배경으로 새로운 땅을 향하는 규남(이제훈)과 그를 막으려는 현상(구교환) 사이 목숨 건 질주를 그린다. 여기서 탈주는 단순히 북을 벗어나는 행위에 그치지 않고 규남의 삶 전체를 결정짓는다.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에서는 무고한 시민들이 도로에 갇힌 채로 재난을 맞는다. 비록 영화 자체는 식상한 전개와 클리셰의 늪에 빠져 재난을 피하지 못하지만 말이다. 달려드는 개와 무너지는 다리 사이에서, 인물들은 오직 생존을 향해 달린다.
한편 <하이재킹>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객기 납치 사건에 관한 실화를 다룬 이 영화는, 납북 혹은 사망이라는 극한의 상황을 찾아 관객과 공유한다. 마치 끔찍한 게임처럼 승객들은 시시각각 더 큰 위험에 처한다. 과연 이들은 무사히 살아남아 삶을 지킬 수 있을까.
세 편의 영화는 장르도, 소재도 다르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이 영화들이 자극하는 감각이 같다는 것이다. 이들은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라거나 '어떻게든 살아남겠다'는 감각을 정확히 조준한다. 세 편의 영화는 관객에게 생존게임을 제안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를 돌아보아도, 오로지 생존에 집중하는 한국 영화가 동시에 흥행 1~5위 안에 입성한 사례는 드물다. 최근 개봉한 영화와 콘텐츠까지 함께 보면 이 같은 경향은 더욱 짙게 느껴진다. 지난해 <콘크리트 유토피아>, <교섭>, <비공식작전>이 개봉했고, 최근 몇 년 사이 <오징어게임>, <The 8 Show>처럼 생존 자체에 집중하는 콘텐츠가 급증했다.
알다시피 영화는 현실과 다르다. 그러므로 이런 영화들이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말하기는 섣부르다. 그러나 장르와 소재를 막론하고, 영화는 당대 관객과 동일한 감성을 공유할 때 폭발적인 반응을 얻는다.
그러므로 2024년 한국에서 '생존'에 대한 감각과 감성을 자극하는 세 편의 영화가 박스오피스 상위권에 나란히 걸린 상황이 예사롭게 보이지는 않는다. 어쩌면 지금 한국 관객의 심리는 생존게임 참가자의 그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지금 우리는 생명의 위협을 받는 인물에게 유독 공감하고 반응할 정도로 내면이 황폐해진 것은 아닐까. 우리가 각자 내밀하게 치르는 생존 전쟁이 스크린 위로 찾아왔다고 표현한다면 과장일까.
전시 상황을 방불케 하는 출산율, 어느 때보다 많아진 쉬는 청년, 폐업 위기의 자영업자 등 아찔한 지표들이 연일 보도되고 있다. 하지만 때로는 예술이 어떤 수치보다 선명하게 현실을 반영한다. 제각각의 방향으로 헐레벌떡 도망치는 인물들. 쉴 새 없이 터지는 위기. 이건 마치 언제, 왜 켜진 줄 모른 채로 시종 울리는 시뻘건 비상벨을 연상하게 한다. 지금 영화로 본 한국은 생존게임에 던져진 상태다.
원문 https://premium.sbs.co.kr/article/meLvDYPiPq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