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 정이삭 감독 후속작, 평범한 재난물로 보이는 않는 이유
※ 'PD저널'에 기고한 글입니다.
[PD저널 =홍수정 영화평론가] 여름 극장가를 겨냥한 재난 영화. 거대한 토네이도로 속까지 시원해지는 작품. 2021년 <미나리>를 연출했던 정이삭 감독의 후속작. <노멀 피플>로 주목받은 신예 '데이지 에드거존스' 주연. 이달 개봉한 <트위스터스>에 따라붙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 모든 수식어를 동원해도 영화는 얼핏 평범한 재난물로 보인다. 스토리나 액션은 잘 짜여 있지만, 예상을 크게 빗나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위스터스>를 두고 "보이는 게 전부인 납작한 작품"이라고 평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 영화는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끊임없이 어떤 말을 속삭인다. 내게는 이 속삭임이, 영화 속 시끌벅적한 재난보다 더 흥미롭게 느껴진다. 아래부터 <트위스터스>에 대한 스포일링이 포함돼 있으니 유의해 읽어주기를 바란다.
'케이트(데이지 에드거존스)'는 어린 시절 멍하니 하늘을 쳐다볼 정도로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를 감각하기 좋아했다. 그러나 케이트는 대학 시절 토네이도를 조사하다 친구와 연인을 잃고 만다. 당시 남자친구 젭(대릴 매코맥)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를 온몸으로 감싸안으며 지켜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케이트에게 토네이도는 두 가지 의미를 띄게 된다. 경외하고 사랑하는 대상이자, 두려움의 근원.
5년 뒤 케이트는 옛 동료 하비(앤서니 라모스)와 만나 다시 토네이도를 추격하기로 결심한다. 이때 케이트가 오랜만에 공터에서 폭풍을 감지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그녀는 민들레 홀씨와 손끝, 흩날리는 머리칼로 다가오는 토네이도를 느낀다. 그녀에게 날씨는 여전히 온몸으로 감각하는 사랑의 대상이다.
그러던 중 케이트는 한 남자를 만난다. 바로 타일러(글렌 파월), '토네이도 카우보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남자다. 타일러는 과거에 로데오 카우보이로 일하기도 했다. 로데오는 소 위에서 떨어지는 순간 죽음의 위험에 노출되는 스포츠다. 두려움에 지지 않고, 소와 한 몸이 되어야 살아남는 경기. 타일러는 케이트에게 말한다. 공포에 맞서지 말고 즐기라고. 이때 자막에는 "즐겨라"라고 표시되지만, 영문 대사에서는 'Ride(몰다)'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마치 날뛰는 소 위에서 함께 출렁거리듯, 토네이도가 선사하는 두려움 속으로 들어가 몸을 맡기라는 것이다.
둘이 데이트하는 도중 다시 폭풍이 불어닥친다. 이 순간 타일러는 온몸으로 케이트를 보호한다. 전 남자친구와의 비극적 순간이 재연되었지만, 이번에는 모두 살아남았다. 그렇게 현재가 과거에 접속하며 케이트의 트라우마는 치유된다. 한층 성장한 그녀는 접어두었던 꿈을 다시 펼친다. 토네이도를 잠재울 자신만의 방법을 고안하는 것이다. 그녀의 연구는 타일러의 도움으로 더 완벽해진다.
그리고 마침내 결정적 장면이 등장한다. 마을에 거대한 토네이도가 닥치고, 사람들은 방황하다 극장으로 대피한다. 점점 커지는 폭풍의 세력. 이대로는 모두가 위험하다고 판단한 케이트. 그녀는 토네이도 안으로 돌진한 뒤 준비해 뒀던 시료를 뿌린다. 이 방식이 실패하면 모두 목숨을 잃게 된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녀는 운전대에서 손을 놓는다. 케이트는 이 순간 진정으로 날뛰는 토네이도 위에 올라타 운명에 몸을 맡긴다.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며 날씨와 사랑에 빠졌던 어린 시절처럼.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공포와 접촉한다.
케이트의 도전은 성공하고, 하늘은 점차 맑아진다. 사람들은 부서진 극장에서 하나둘 걸어 나온다. 타일러와 케이트의 사랑을 암시하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그러니까 <트위스터스>는 접촉으로 시작해 접촉으로 끝맺는 영화다. 케이트는 날씨와의 접촉을 사랑했고, 전 남자친구의 접촉으로 사고에서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이 사고로 토네이도와의 만남이 두려워졌다. 타일러는 그녀에게 공포의 대상과 몸을 맞대라고 충고한다. 그와의 경험으로 케이트는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접촉의 중요함을 다시 깨닫는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토네이도 안으로 온전히 들어갔을 때, 케이트는 공포에 맞서지 않고 즐기는 데 성공한다.
그렇다고 <트위스터스>가 무조건 "두려움 속으로 뛰어들어라"라고 말하는 영화는 아니다. 영화는 이런 삶의 태도가 지니는 위험도 인지하고 있다. 로데오가 그렇듯, 공포에 몸을 내맡기는 순간 우리는 한없이 위험해진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서 하는 줄타기다. 영화는 이런 태도가 마냥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 방식을 사랑하며,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여줄 따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케이트의 대척점에 선 인물이 있다. 그는 기자 벤(해리 해든페이턴)이다. 벤은 폭풍 추격대와 함께 토네이도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멀미한다. 마지막에 이르러 그는 추격대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며, 자신만의 취재를 지속한다. 결국 폭풍 추격대의 활약을 기록해 세상에 알리는 것은, 적정거리를 지켰던 벤이다. 그는 위험에 접촉하지 않으면서도 자기만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케이트와 벤의 삶의 방식은 이다지도 다르다. 그런데 영화에서 둘의 방식이 교차하는 공간이 등장한다. 그것은 바로 극장이다. 처음 사람들이 토네이도를 피해 대피했을 때, 극장에서 영화 <프랑켄슈타인>이 상영되고 있다. 이것은 기록으로서의 필름 영화다.
하지만 토네이도로 스크린이 갈가리 찢기다 날아갔을 때, 사람들은 스크린 쪽의 구멍을 통해 폭풍 치는 하늘을 본다. 그 광경은 마치 재난 영화를 관람하는 듯하다. 기록으로서의 영화가 사라지고, 이 순간 관객은 현실의 스펙터클과 접속한다. 그리고 폭풍이 멎자 사람들은 스크린 쪽의 구멍을 통해 바깥으로 나간다. 이 장면에서 관객은 스크린 속으로 걸어 들어가, 영화와 물리적으로 합치된다. 정이삭 감독은 이 장면에서 영화와의 '접촉'이라는 오랜 판타지를 은밀하게 실현한다.
코로나 시기를 지나 어느덧 '언택트'가 대세가 된 시대다. 몸을 내던진 접촉의 힘을 믿는 것은, 오래된 신화를 믿는 것만큼이나 고루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트위스터스>의 속삭임도 자칫 허황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상관없어"라고 이 영화는 말한다. 여기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두려움을 마주할 때 그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사랑하고, 끝내 허물어뜨리는 사람들. 그들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이다. <트위스터스>를 재난 영화로 분류해야 할까? 내게는 영락없는 멜로 영화로 보인다.
원문 https://www.pd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803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