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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Dec 25. 2024

활자 샤워

최근에 책을 쓰고 있는데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평소에는 줄줄 썼던 글도 책 위에 올라갈 거라고 생각하면 문득 부끄러워져서 지우고 다시 쓰고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한다. 그러면 마치 메이크업을 하다가 립스틱을 칠하고 지우고 다시 칠하고 지운 것처럼, 글이 얼룩덜룩 꾀죄죄해지는 것이다. 하아.. X같은 글쟁이 팔자.  


이럴 때는 머리를 환기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 다른 글을 읽는 것은 내 글을 쓰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 나는 '글쓰기는 빅뱅'이라고 믿는다. 많이 읽다 보면 빅뱅이 일어나듯이 자기만의 글이 터져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제 상당히 많이 읽어야 하는.. 그걸 좀 단축시키기 위해 우리는 글쓰기를 배우는 것이고.  


여튼. 글이 안 써져서 책을 읽는데, 너무 짜증 나고 지칠 때는 그거조차 잘 안 읽힐 때가 있다. 뇌가 영상에 찌든 탓이다. 책은 던져버리고 편하게 유튜브나 보고 싶다. 그래서 요즘 자체적으로 동영상 검열 시스템을 가동 중인데, 모든 검열이 그렇듯 금지하니까 더 재밌다. 히히. 


그래서 책조차 안 읽힐 때는, 일단 활자를 눈에 바른다는 생각으로 글을 읽는다. 어떤 글이든 좋다.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든 안 들어오든 신경 쓰지 말고 쭉쭉 읽는다. 일단 글자와 친해지자는 생각으로. 영상에 익숙한 뇌가 다시 글을 받아들이도록 활자를 시원하게 들이부어 리셋한다. 나는 이것을 '활자 샤워'라고 부른다. 


참 세상이 신기해져서 글을 읽는 것이 대단한 집중력과 자제력을 요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어쩌겠나. 한글 소설이 도파민이던 조선 시대로 돌아갈 수도 없고.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생존 방식이 필요한 걸. 한때 굶주리던 인류는 이제 온갖 노력을 들여 다이어트를 하고, 자꾸만 눈치 없이 퇴화하는 근육을 되살리기 위해 헬스장을 찾는다. 그리고 나는 지금 시대에 적합한 글쓰기 비법을 새로 찾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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