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홍수정 Jun 23. 2018

<디트로이트> 비평과 코멘트

<씨네21> 기고한 비평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씨네21>에 기고한 글입니다.




캐스린 비글로의 <디트로이트>가 진실 밝히기보다 더 관심을 기울인 것은  

글 홍수정(영화평론가) 2018-06-20




다시 살려내야 하는 목소리들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하나의 매혹적인 장면과 마주한다. 클럽에 있던 흑인들이 차례로 연행되자 이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클럽 앞으로 모여든다. 체포되는 친구를 걱정하는 웅성거림, 경찰에 항의하는 볼멘소리들. 그들의 음성은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천천히 몰려와서는 어두운 골목을 가득 메운다. 시끄럽고 폭력적이지만 풍성한 소리들의 다발, 이 장면에서 여러 목소리가 흘러넘치며 만들어내는 위태롭고도 관능적인 에너지는 다른 여느 장면들을 가볍게 압도한다. 동시에 이런 질문도 가능할 것 같다. <디트로이트>에서 제각기 떠드는 다중의 시끄러운 목소리는 어째서 이다지도 매혹적인가. 장면이 전환되면 한 남자가 위험한 장난을 벌이고 있다. 장난감 총으로 공포탄을 쏘는 칼 쿠퍼(제이슨 미첼)의 목적은 단 하나, 총구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흑인들의 심정을 느껴보라는 것이다. 허공에 울리는 공포탄의 총성은 울분에 찬 칼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소리가 창문을 넘어 경찰에게로 향하자 화가 잔뜩 난 경찰들이 모텔 앞으로 몰려든다. 자, 여기까지. 영화는 50년 전 디트로이트에서 차별에 항거하여 소란스럽게 터져 나왔던 소리들을 응시하며 시작된다. 그리고 칼의 실없는 농담을 통하여 캐스린 비글로는 어떤 제안 하나를 우리에게 슬며시 건네어온다.    

폭력을 전시한다는 꾸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매번 비극의 장소에 함께 입회하여 그 순간을 체험해볼 것을 끈질기게 고집해왔다. 알제 모텔의 문이 열렸고, 우리는 그녀의 제안을 거부할 수 없다.


실탄 없는 총성의 위협

모텔에 도착한 경찰들은 가장 먼저 칼을 살해한 뒤, 흑인 투숙객들을 복도에 일렬로 세우고 매질을 하며 총의 소재를 따져 묻는다. 잠시 후 경찰 필립(윌 폴터)은 그들에게 기도를 할 것을 주문한다. 기도와 찬송, 이 지극히 사적인 행위는 폭력적으로 강요되고, 사람들은 울음을 터뜨리듯 괴롭게 기도를 이어간다. 영화는 좁은 복도에 갇힌 그들의 모습을 통하여 공적, 사적인 영역 모두에서 발언의 자유를 박탈당했던 당대 흑인들의 처지를 환기시킨다. 폭력을 참지 못하고 기어이 온몸으로 비명을 내지른 유일한 인물이 백인 여성 캐런이라는 사실도 인종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총의 소재를 찾을 수 없었던 경찰들은 이제 가학적인 심문을 시작한다. 그런데 그 심문의 방식이 독특하다. 복도의 흑인 중 한 명을 방에 데려가서 총소리를 낸 뒤, 마치 죽은 듯 그 자리에 조용히 있게 한다. 그래서 복도에 남은 이들이 그가 총에 맞아서 죽었다고 생각하여 겁에 질려서 무언가 발설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곧 누군가를 무리에서 이탈시킨 뒤 그의 목소리를 제거하는 행위다. 경찰이 사라지기 전까지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고, 목소리조차 낼 수 없는 그들은 이 세계에서 죽은 자들이다. 허락한 말밖에 할 수 없는 복도, 그들을 차례로 집어삼키는 검은 방. 캐스린 비글로는 알제 모텔이 두 개의 층위로 나뉘어 연동하며 희생자들의 목소리를 빼앗는 과정을 통하여 50년 전 미국을 환유한다. 이곳을 떠나기 직전, 경찰들은 살아남은 사람들을 한 명씩 데려다가 그들이 벌인 범죄 행위를 발설할 것인지를 묻는다. 누군가는 침묵을 약속하고 누군가는 도망치지만, 여기에 희생된 사람이 있음을 힘주어 말한 자는 그대로 죽임을 당한다. 마지막 발언까지 완벽하게 삭제하고서 경찰들은 알제 모텔을 떠나간다. 결국 이 밤에 세명의 흑인이 희생되고 끝내 총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것은 모두 칼의 짓궂은 장난과 경찰의 오해에서 비롯된 비극적인 헛소동일까. 실은 그들은 실탄 없는 총성만으로도 완전한 위협을 느꼈다고, 그 소리를 죽이기 위하여 이곳에 찾아와 기어코 임무를 완수하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날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은 목소리를 되찾았을까. 그것을 확인시켜주기 위하여 후반부의 법정 장면이 등장한다. 그들의 증언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유일하게 진실의 말(경찰들이 나를 때렸고, 이 증인 신문조차도 폭력이다)을 토해낸 남자는 법정에서 쫓겨난다. 누군가가 그 지옥으로부터 살아남았다지만 그날의 비극을 증언하고 확인하는 목소리는 이곳에 없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그날 밤, 알제 모텔을 무사히 살아 나온 목소리는 없다고. 이 영화적 세계에서 자유로이 발언할 때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날의 생존자는 아무도 없는 셈이다.


왜 이렇게 모호해야 했나

<디트로이트>는 알제 모텔 사건을 소재로 하지만, 그렇다고 영화가 그 사건의 진실을 발굴하고 폭로한다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있다. 필립이 끈질기게 의심을 던졌던 사실들, 줄리(한나 머레이)의 성매매 여부나 그린(앤서니 마키)의 공군 복무 여부에 대하여 영화는 의도적으로 확답을 피하고, 마지막에는 “입증된 사실은 없고 관계인들의 기억과 증언만으로 사건을 재구성했다”는 자막이 오른다. 영화가 틈틈이 드러내는 모호한 구멍과 한계는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역사적 재구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적당한 선에서 주저앉는 영화는 아닌 것 같다. 실패하고 흩어진 바로 그 자리에서 비글로는 끊임없이 어딘가를 향하여 손짓한다.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폭동 때문에 예정된 공연이 무산되자 래리(알지 스미스)는 아쉬운 듯 텅 빈 무대 위를 서성인다. 소란한 바깥과 고요한 객석의 대조가 만들어내는 긴장감이 이 장면을 내리누른다. 그때 불현듯 래리가 노래를 시작한다. 팽팽하게 긴장된 극장의 공기를 뚫고 비행하는 래리의 아름다운 목소리. 이 장면은 내게 <허트 로커>(2008)에서 보았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주인공이 폭탄을 제거하려고 걸어가던 그 긴장된 순간에도 불현듯 경직된 공기를 뚫고서 정체 모를 차 한 대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비글로는 자주 폭발의 그림자가 일렁이는 적막한 공기와, 그것을 찢고 들어오는 유려한 움직임을 통하여 서스펜스를 직조한다. 예상치 못하게 벌어진 틈새는 아름답고 신비롭지만 불안을 고조시키고 죽음의 냄새를 풍긴다. 무대 위를 떠돌던 래리의 목소리는 다시 그곳에 돌아오지 못했으니, 결국 이 장면의 불안과 공포는 실현된 셈이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순간, 그를 괴롭힐 누구도 없는 교회에서 래리는 자유로이 가스펠을 부른다. 그의 노래에 조용히 집중하는 영화를 보고 있자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디트로이트>는 래리의 목소리를 다시 들려주기 위하여 50년의 시간을 건너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 아닐까. 비글로의 진짜 야심은 그날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그날 밤에 사라졌던 목소리들을 불러 모아서 이곳에 되살리는 일이 아닐까. 그런 의문을 품을 때 앞서 등장한 군중의 목소리가 그다지도 매혹적이었던 이유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시간을 되돌릴 수도, 사건을 입증할 수도 없는 명백한 한계 앞에서 비글로는 그들의 목소리를 다시 한번 듣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 단순한 행위가 품는 넓은 세계를 새삼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짓밟히고 삭제된 목소리의 회생을 소망하는 끈질기고 간절한 몸짓. 그것만으로도 <디트로이트>는 더 많이 관람되고 회자되어야 할 영화다.








추가적인 코멘트


<디트로이트>는 초반부에 한 남자를 등장시키며 이 영화의 성격을 명료하게 보여줍니다. 식료품을 훔치고 달아나던 남자는 등에 총을 맞고 트럭 밑에 숨어서 피를 흘리는데요, 이때 남자는 지나가던 할머니에게 아내를 불러줄 것을 말하지만 할머니는 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합니다. 반면 총을 쏜 경찰은 상관에게 등을 맞힌 것은 실수였으며, 그럼에도 치안을 위해서 필요한 행동임을 또박또박 얘기하죠. 총에 맞은 흑인과 총을 쏜 백인 경찰. 영화는 이 두 사람의 목소리의 차이를 명확하게 제시하고 시작됩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가진 힘의 차이는 영화 내내 반복되고 지속되죠.


영화에서 흑인들은 모텔 안에 억류되어 있으며 이것이 곧 목소리를 향한 제압의 움직임이라고 언급했습니다. 그럼에도 밤새 알제 모텔을 비교적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흑인이 한 명 있는데요, 바로 경비원 멜빈(존 보예가)입니다. 그는 주변을 조심스레 살피는 큰 눈과 굳게 다문 입이 특징적인 사람입니다. 멜빈은 경찰들의 주장(저 흑인이 먼저 총을 빼앗으려고 해서 쏘아서 죽였다)도 순순히 받아들이며, 폭력적인 경찰에 대하여 어떠한 반항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심지어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우악스럽게 떠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입을 굳게 다물고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아요. 그가 밤새 알제 모텔을 돌아다니며 상처입지 않고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스스로 목소리를 제거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지나가던 흑인도 멜빈더러 '엉클 톰(백인의 비위를 맞추어 살아남으려는 흑인들을 조롱하는 단어)'이라는 언급을 하죠.


<디트로이트>는 캐서린 비글로우의 작품답게 역사를 하나로 정리하려는 태도를 의식적으로 피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토록 협조적인 멜빈조차 경찰 조사에서 거짓말을 하고요(내가 들어갔을 때 이미 세 명이 죽어 있었다), 정확하지 않지만 정황상 줄리도 멜빈을 용의자로 지목했던 것 같습니다. 그녀가 경찰서에서 유리를 통해 멜빈을 본 후 멜빈이 감옥에 갇히니까요. 또한 법정에 선 피해자들의 진술에는 허점이 드러납니다. 물론 이것은 변호사의 집요한 심문에 의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한 편으로 그들의 진술이 그만큼 강력하지 않다는 뜻도 되겠죠. 그러니까 피해자들의 증언에도 거짓과 착오가 있을 수 있음을 계속해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게다가 영화의 마지막에는 "이 영화는 관계인들의 진술로 재구성했다"는 자막이 오릅니다. 이것은 영화를 통한 역사 재구성의 한계를 고백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느껴집니다. 그러니까 캐서린 비글로우가 이 영화를 통해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그 날의 명확한 진실은 아닌 셈입니다.


게다가 <디트로이트>는 영화라는 매체가 '가짜'일 수밖에 없다는 자의식도 지니고 있어요. 래리는 마지막에 공연장에서 "나는 진짜야(I'm real)"라는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을 지켜보다가 그대로 발걸음을 돌립니다. 영화 역시도 아무리 재구성에 심혈을 기울여도 종국에는 가짜인 이야기일 수밖에 없죠. 그러나 래리가 자주 부르는 노래 가사, "내 눈을 봐, 눈물이 보이지 않니(기억상 정확하지 않을 수 있음)"처럼 가짜인 이미지라 하더라도 그 형상을 향하여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이 영화의 목표인 것처럼 보입니다. 칼 쿠퍼가 총에 맞아 죽을 때 카메라는 눈물이 흐르는 그의 눈을 클로즈업하고, 마지막 끝나기 직전에 위를 올려다보는 래리의 눈을 다시 한번 바라봅니다. 

그러니까 '결코 닿을 수 없는 그 날의 진실에 대하여 우리는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캐서린 비글로우의 답은 '진실은 아니지만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일 것입니다. 이 영화 자체가 그렇습니다. 진짜 영상은 아니지만 진실에 가까운 영상. 피해자들의 증언이 모두 사실은 아니지만 사실에 가장 가까운 것처럼요. 이런 태도야말로 다시 불러올 수도, 그저 잊을 수도 없는 역사를 대하는 캐서린 비글로우의 자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태도가 영화 안에서는 '그들의 목소리를 되살리는 일'로 발현되는 것이겠죠. 피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창작한 영화를 보는 일이야말로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이 될 것이고요. 영화는 마지막에 어딘가를 올려다보는 래리의 얼굴을 지켜보며 끝이 납니다. 이 장면은 "내 눈을 봐"라고 노래하던 래리의 목소리와도 연결되죠. 가짜에 불과한 영화 이미지, 그 안에 담긴 캐릭터의 눈. 어쩌면 캐서린 비글로우는 우리가 가짜인 이미지 너머로 진실을 바라보길 바랐던 것은 아닐까요. <디트로이트>는 역사와 재현의 모순 앞에서 나름의 답을 찾고 끈질기게 나아가는 캐서린 비글로우의 태도가 감명 깊게 다가오는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개봉작 추천, <디트로이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