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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Jun 25. 2018

<버닝>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

영화 비평

※ 스포일러 있어요.



직업이 영화평론가인지라 영화에 관한 평들을 웬만하면 짧게라도 쓰려고 하는데, 그럼에도 평을 쓰지 못하는 이유에는 몇 가지가 있다. <버닝>은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경우다. 뒤늦게라도 정리된 생각들을 남겨볼까 한다.



1. 얇고도 흐릿한 막

버닝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등장하는 것은 '비닐하우스'다. 정확히는 비닐하우스로 상징되는 얇고도 흐린 막. 꽤 의미 있게 등장하지만 의외로 잘 언급되지 않는 것 중 하나는 종수(유아인)와 해미(전종서)의 섹스신에서 나오는 콘돔이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여느 정사 장면들과 다르게 콘돔을 꺼내는 해미와 그것을 잠자코 쳐다보는 종수의 모습을 보여준다. 종수가 그것을 쳐다보는(콘돔을 하는) 순간의 타이밍은 그저 기능적이라고 보기엔 꽤 길어서 섹스신의 긴장을 해칠 정도다. 그럼에도 이 장면이 필요한 이유는 말 그대로 콘돔이라는 얇은 막을 쳐다보는 종수의 얼굴이 영화에 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하게 벤이 어느 여인을 화장하기 직전 그는 렌즈를 낀다. 렌즈 역시도 세상과 자아의 경계에 위치하며 세상을 들여다보는 창으로서의 얇은 막이다. 벤이 운동하며 종수를 내려다볼 때, 종수가 벤의 뒤를 쫓으며 트럭의 창 너머로 그를 쳐다볼 때 그들의 사이에는 늘 유리가 있다. 이 유리는 얇은 막의 변용으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비닐하우스. 영화에서 종수는 비닐하우스의 존재만을 확인해도 충분한 시점에 늘 그것에 가까이 다가가서 속을 들여다본다. 그 장면의 신비롭고도 기괴한 공기는 <버닝>이 이룬 가장 아름다운 성취일 것이다. <버닝>은 얇은 막을 통하여 세상의 건너편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이미지로 수렴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이 얇은 막은 스크린에 대한 비유가 된다. 우리는 스크린이라는 하얗고 얇은 막을 통하여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한편 영화에서 막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지위의 우열을 함유하기도 한다. 보는 이는 보이는 이보다 우위에 서서 상대를 응시한다. 벤이 고층 빌딩의 유리를 통하여 종수를 내려다볼 때, 눈에 렌즈를 끼고 여자에게 화장을 하여 줄 때, 보이는 이의 이미지가 보는 이의 시선 안에서 은밀하게 착취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미술관에서 종수가 용산참사에 대한 사진을 들여다볼 때, 사각의 프레임 안에 포착된 그들의 모습은 종수의 시선 안에 가두어졌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장면 뒤로 종수가 벤의 가족을 볼 때 벤의 뒤 편에 선 종수는 사각의 틀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용산참사가 사각의 프레임 안에 갇혀서 미술관에 전시되듯, 벤을 따라온 종수의 간절한 모습도 사각의 프레임 안에 갇혀서 우리의 시선 안에서 무력하게 착취된다. 사각의 프레임 안에 선 남자의 모습은 벤의 집 화장실 옆 통로에 있던 그림과도 일치된다. 그 작품 안에는 사지의 실루엣을 드러내고 선 한 인간의 모습이 보인다. 이 이미지는 마지막에 종수가 옷을 벗고 트럭으로 걸어갈 때의 모습과도 겹쳐진다(이때 종수는 유독 팔과 다리를 뻣뻣하게 펴고 걸어간다). 그렇게 프레임 안을 위태롭게 떠돌던 종수는 마침내 작품 안에 포획되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이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흥미로운 면이자, 무수한 해석을 생성하는 원동력일 것이다. 영화는 얇은 막과 사각의 틀을 중층적으로 사용하여 현실과 이야기에 대한 무수한 다층구조를 생성한다. 그럼으로써 인물들 간, 인물과 관객 간의 관계를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2. 미스터리

영화의 인물들은 모두 얼마간 미스터리를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종수는 늘 제대로 알 수 없는 대상을 뚫어지게 볼 수밖에 없다. 이것이 곧 위에서 언급한 흐릿한 막을 통하여 대상을 보는 행위이며, 영화가 계속하여 변주하는 '슈레딩거의 고양이'의 상징과도 연결된다.


슈레딩거의 고양이(정확하지 않지만 이해한 대로 간단하게 씀) : 현대 물리학에서 말하는 '슈레딩거의 고양이' 이론에 따르면 상자를 열기 전까지는 상자 안에 고양이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혹은 결정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상자를 열기 전에 고양이는 그곳에 '존재할 가능성', 혹은 '불확정적인 상태'로서 존재한다. 결국 관찰자의 관찰(상자를 여는 행위)이 대상의 상태를 결정하는 것이다. 재밌게도 해미 역시 귤을 먹는 팬터마임을 보여줄 때, 귤을 상자에서 꺼내는 동작을 한다. 상자를 여는 해미의 동작이 '귤이 그곳에 있게' 하는 것이다.


종수에게 세상은 모두 미스터리이지만 그는 끊임없이 분노를 느낀다. 그 분노가 불합리한 세상 때문인지 자신의 착각 때문인지 그는 알 수 없다. 따라서 종수는 이제 결정해야 한다. 그 분노를 정당한 것으로 믿고 책임자를 처단할 것인지, 그저 착각에서 온 허상이라고 믿고 참을 것인지. 결국 누구도 진실을 알 수 없고 이것은 그저 '믿음'과 '선택'의 문제일 따름이다. 어떤 스토리를 믿고 어떤 선택을 내릴지는 오로지 종수의 몫이다.



영화는 마치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세상에 대한 모든 분노는 이런 형태로 다가온다고 말하는 것 같다. 종수의 아버지도 종종 화를 참지 못한다. 의자를 던졌다는 그의 분노가 정당한 것인지, 종수의 말대로 '분노조절장애' 때문인지, 혹은 친구의 말대로 원래 또라이라서 그런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벤이 늘 얼굴에 머금는 미소가 친절인지, 종수를 무시하는 속마음을 감춘 가식인지는 우리는 끝내 알 수 없다. 종수는 분노의 정당성을 알 길이 없고, 분노를 표출할지를 선택할 수 있을 따름이다. 사실 이런 고민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하다. 금수저에 대한 인터넷의 기사 하나만 보아도 그 댓글란에는 '잘난 놈들만 더 잘나게 되는 세상'이라는 한탄과, '괜히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열폭하지 말라'는 빈정거림이 공존한다.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각자의 생각에 따라 어느 편에 설뿐.

 

어쩌면 이창동의 눈에 비친 2018년의 사회 구조는 그런 것이 아닐까. 구조적인 폭력은 일상의 풍경 뒤로 세련되게 숨어버리고 개인의 화가 '정당한 분노'인지 '정신병'인지 알 수 없는 사회. 이제 선택과 믿음의 문제는 종수뿐 아니라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도 제시된다. <버닝>이 단순한 이야기에 불과한 것인지, 이 시대의 비극을 반영한 진실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2시간 동안 영화를 열심히 보고 나서 한 번 선택해 봐. 이 이야기에 분노할지, 웃고 넘길지는 당신의 선택이야. 영화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영화의 태도를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 있다. 종수가 처음 시골집에 도착하여 집 안을 돌아다닐 때 텔레비전에서 정치 사회에 대한 뉴스가 나온다. 이때 집의 리얼한 모습과 텔레비전 화면의 딱딱한 감각이 대조를 이룬다. 그때 어디선가 전화가 걸려온다. 그 전화가 미스터리로 연결됨을 우리는 알고 있다. 종수가 사는 생생한 현실, 정리된 정보로서의 뉴스,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드는 한 통의 전화. 영화는 그 전화처럼 현실과 뉴스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파고들어서 그 틈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더는 해답을 줄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 그 부지에서 기인하는 미스터리와 선택의 중압감을 장르적으로 재현하는 것. <버닝>을 통하여 이창동이 나아간 지점은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3. 동의할 수 없는 영화의 태도

그럼에도 <버닝>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영화가 '미스터리'를 주요한 테마로 이끌고 가지만, 진정 투명한 태도로 미스터리를 제시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나는 의심이 든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우혜경 영화평론가가 <씨네21>에 기고한 비평문(http://www.cine21.com/news/view/?idx=6&mag_id=90340)에서 언급한 바 있다. 글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영화가 '칼'과 '아버지의 분노조절장애'를 종수 앞에 준비해 두고서, 이 분노를 위하여 칼을 휘두를 '벤'을 종수 앞에 데리고 와서는 끊임없이 종수를 유혹한다는 것이다. 결국 영화는 벤에 대한 종수의 살인을 미리 예비해두고서, 이 결말을 종수의 '선택'이라며 무책임하게 끝을 낸다는 것이 우혜경 평론가의 주장이다. 나는 그녀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벤을 찌르는 마지막 장면이 소설인지 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나쁜 피와 종수의 어두운 과거(어머니의 옷을 스스로 태우던), 그리고 비닐을 태우는 꿈 등을 통하여 영화는 분노가 폭발되는 이미지(벤을 살해하는 이미지)의 등장을 예비해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미스터리가 아니라 이미 답이 정해진 수수께끼다. '버닝'은 타오르는 종수가 아니라 끊임없이 종수를 태우는 영화에게 더 적합한 말이다. 차라리 이 영화가 미스터리를 표방하지 않았으면 나는 영화에 동의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살인이 미스터리에 대한 '종수'의 선택이 아니라 '영화'가 제시하는 이야기라고 한다면 말이다. 이미 결론을 유도하고서 이 파국은 모두 너(종수)의 선택이라며 끝을 맺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태도다. 어쩌면 세계의 불가사의와 스스로 만들어낸 이야기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는 것은 종수가 아니라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4. 나의 의심

지금부터 하는 말은 내가 받은 느낌이자 의심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고 동의하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솔직히 할 말은 없다. 그럼에도 그 불완전함을 무릅쓰고 그 느낌과 의심을 고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마저 적어보려고 한다.


영화가 미스터리가 아닌 것을 미스터리로 표방한다고 했을 때,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왜 그랬을까? 왜 영화는 자신의 생각을 미스터리로 감추고, 스스로 예비한 결론을 종수의 결론이라고 주장할까? 물론 일차적인 답은 원작이 그렇기 때문이라는 것이겠지만, 그 이면에 다른 욕망이 작동한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의심은 영화가 "미스터리 안을 헤매는 종수의 이미지"에 취해있다는 것이다. 영화가 정해진 결론을 감추고 미스터리를 유지하여야 그 안을 헤매는 남자의 이미지가 도출될 수 있다. '이야기'는 미스터리가 아닌데 '이미지'는 미스터리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버닝>이 지닌 모순일 것이다.


또한 종수에게 선택의 기회가 주어질 때 제 발로 파국을 향해 걸어가는 결말의 비극성이 강조되는 효과도 있다. 결국 이것은 미스터리 안에서 허덕대다 비극적 선택을 하는 이미지로 귀결되며, 고통의 대상화와도 맞닿은 문제다. 어쩌면 영화는 고통 속에서 허덕이는 종수의 이미지에 취한 것은 아닐까. 우리의 흔한 착각은 찬성하는 입장에만 취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반대하는 태도에도 얼마든지 취할 수 있다. 우리는 종종 사치에 반대하면서도 사치스러운 이미지에 홀리고, 폭력에 반대하면서도 피 튀기는 이미지에 매료된다. 이창동이 사회의 구조적 폭력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을 고수하여 왔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입장과는 별개로 <버닝>이라는 영화는 '종수'의 고행을 대상화하며 그 이미지에 탐닉한다는 의심이 지속적으로 든다. 이 영화에 그리는 청춘이 대상화되었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비판은 단순히 영화에서 그려진 현실 감각이 올드하다거나, 디테일이 떨어진다는 차원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관객이 대상화를 느낀 지점은 헤매고 폭발하는 종수의 가여운 이미지에 대한 탐닉의 기운에서 온 것일 수도 있다. 종수뿐 아니라 벤과 해미의 경우에도 카메라가 누군가의 시선에 비친 그들의 모습을 그대로 스크린에 옮기는 순간이 종종 등장하는데, 카메라가 타인의 시선에 깊숙이 들어가서 그것을 관객에게 체험하게 하는 문제에 대하여 좀 더 고민해야 된다고 느껴진다.



5. 예정해두고 탐닉한 것은 아닌가

<버닝>은 미스터리 한 세계를 대면하고 종수에게 선택을 맡긴 것처럼 보이지만, 그와 모순되는 지점들이 영화의 여기저기에 돌출되어 있다. 또한 그런 모순의 끝에는 미스터리 안을 헤매는 종수의 아름다운 이미지가 위치한다. 때문에 미스터리를 내세우면서도 사실은 비극을 계획하고 추진하며 그 과정의 이미지를 탐닉하고 있다는 의심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그 결과로 얻어진 이미지가 더없이 아름답다는 것이 또한 아이러니다. 내게 <버닝>은 한 남자가 안갯속을 달리며 희뿌연 비닐하우스 안을 들여다보던 아름답고도 섬뜩한 장면으로 남았다. <버닝>에 대한 평가는 이런 의심들을 끌어안고 영화의 성취를 긍정할 것인지, 혹은 그 성취에도 불구하고 의심을 직시하며 멈춰 설 것인지에 대한 선택의 문제로도 보인다. 나의 입장은 후자다. 어찌하여도 답이 정해진 질문지를 건네며 그의 비극에 취하였다는 의심을 거둘 수는 없을 것 같다. <버닝>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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