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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을 돌려주는 영화"…<얼굴>의 결말에 관하여

by 영화평론가 홍수정

※ SBS의 '스브스 프리미엄'에 기고한 글입니다

common?quality=75&direct=true&src=https%3A%2F%2Fmovie-phinf.pstatic.net%2F20250728_188%2F1753664791512tGj6H_JPEG%2Fmovie_image.jpg 영화 <얼굴> 스틸컷

<부산행>, <반도> 등을 연출한 연상호 감독의 신작 <얼굴>이 최근 극장가에서 박스오피스 1위를 달성했다. 하지만 영화 자체는 큰 논의를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연상호의 흥미로운 시도' 정도로 일축되는 것 같다. 그러나 <얼굴>이 품은 메시지와 그것을 풀어내는 실력은 연상호의 작품 중에서도 뛰어나다. 특히 이 영화의 결말은 주제를 압축적으로 담고 있어 관객의 사려 깊은 눈길과 해석과 요청한다. 오늘은 <얼굴>의 결말을 위주로 영화의 의미를 다시 이야기하려 한다. 아래부터 <얼굴>에 대한 스포일러가 나온다.


영화의 초반에 중요한 농담이 하나 등장한다. 전각 장인 영규(권해효)를 취재하러 온 다큐멘터리 PD 수진(한지현)이 묻는다. 아들 동환(박정민)을 키우는 과정이 힘들지 않았냐고. 이때 영규는 자식을 홀로 키운 자기 처지를 <심청전>의 '심학규(심 봉사)'에 비유한다. 얼핏 스쳐 지나가는 이 농담은 이상한 정념을 남긴다. 심학규가 누구인가. 자식의 희생으로 눈을 뜬 인물이 아닌가. 효녀의 아버지로 통용되는 이 남자의 스토리는 실은 잔혹하다. 영규의 비유는 단지 시각 장애라는 공통점만을 염두에 둔 것일까? 누군가의 희생에 대한 복선인가? 이 정도의 의문만을 남겨둔 채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기로 하자. 우리는 잠시 후에 답을 찾을 것이다.


common?quality=75&direct=true&src=https%3A%2F%2Fmovie-phinf.pstatic.net%2F20250728_98%2F1753664760435TIWgF_JPEG%2Fmovie_image.jpg <얼굴> 스틸컷


영규의 아내인 영희(신현빈)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녀는 한마디로 '진실을 드러내는 인물'이라 칭할 수 있다. 그녀는 어릴 때 아버지의 외도를 발설했다가 집에서 쫓겨난다. 공장에서 일할 때는 화장실 갈 시간조차 주지 않는 상황을 못 견디고 바지에 실례를 해 버린다. 요령을 부리지 못하고 열악한 업무 강도를 온몸으로 드러내는 영희. 그녀가 배설한 것은 '우리 안에 있지만 아무도 맨눈으로 보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그러니까 몸의 오물이자 사회의 더러운 진실이다.


영희는 백주상(임성재) 사장의 악행을 폭로하고야 만다. 자신을 홀대하는 사수 진숙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납득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위에서 보았듯이 영희는 그런 사람이다. 어떤 수모를 당하더라도, 진실을 만천하에 드러내고야 마는 사람.


하지만 결과는 참혹하다. 영희를 사지로 몰아넣은 것이 누구인가를 판단하는 일은 쉽지 않다. 직접적인 폭력은 영규가 저질렀지만, 그녀의 손을 놓은 것은 진숙이다. 어렸을 때와 똑같은 구도. 영희는 폭력적인 남자와 이기적인(자기 자신을 위해 영희를 버리는) 여자의 합작으로 멍든다. 그녀는 집에서 쫓겨났던 어린 시절처럼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배제된다.


영규도 딱한 점이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사회의 폭력을 극복하기보다 깊숙이 내면화하여, 자기보다 약한 아내에게 퍼붓는 쪽을 택한다. 온 세상으로부터 받은 조롱으로 길러진 그의 수치심은 엉뚱하게도 아내에게 투사된다. 그는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못생긴 아내 때문에 수치스럽다. 그는 모른다. 자기를 위해주는 유일한 사람을 자기 손으로 죽였다는 것을. 일찌감치 들킨 범죄를 '아무도 모를 것'이라 자신할 때 느껴지는 부끄러움은 우리의 몫이다.


동환은 진실을 깨닫지만, 잠시 분노할 뿐 이를 묻기로 한다. 여기에서 이 영화의 주요한 장치가 빛을 발한다. 박정민 배우가 '젊은 영규'와 '동환'을 모두 연기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스토리상 다른 인물이지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 동일 인물이라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결국 아버지를 따라가는 동환의 선택은 둘의 동일성을 강조하며 "동환 씨는 아버지를 닮았어요"라는 수진의 말은 그에 관한 확인사살이다. 그렇게 볼 때 영규는 아내의 죽음을 딛고 성공하여 동환으로 재탄생하며, 보이지 않던 '눈을 뜬다'. 심청이의 희생으로 눈을 뜨는 심학규의 설화는 이렇게 영규 위로 겹친다.


<얼굴> 스틸컷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하나 더 남았다. 그건 영희의 얼굴에 관한 오래된 소문이다. '못생겼다'는 한 마디는 영화를 추동하는 큰 바람이다. 마지막 순간에 드디어 동환은 영희의 사진을 손에 쥔다. 이때 영화는 상당히 시간을 끌며 뜸을 들인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과연 <얼굴>은 어떠한 방식으로 끝을 맺을까. 충격받은 동환의 얼굴? 사진을 보지 않는 선택?


예상은 빗나갔다. <얼굴>은 영희의 얼굴을 그대로 보여주는 선택을 한다. 많은 이들이 이 장면의 의미를 궁금해한다. 그도 그럴 것이, 막상 드러난 영희의 얼굴은 평범하다. 우리는 찬찬히 뜯어보며 골똘히 고민한다. 정말로 못생긴 얼굴인가?


하지만 <얼굴>은 바로 그 순간의 우리를 포착한다. 영희의 얼굴을 판단하기 위해 스크린 앞에 모인 우리를. 그녀의 얼굴을 평가의 대상으로 삼는 순간 우리는 영희에 관한 오랜 소문 안으로 초대되고, 빠져나갈 수 없는 공범이 된다. 아버지의 과오를 이어받는 동환, 여기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수진뿐만 아니라 그걸 지켜보는 우리 모두 영희를 둘러싼 폭력의 굴레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 여자의 사진 앞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것을 골똘히 바라보고 있는 우리 자신이다. <얼굴>이라는 제목이 지시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우리의 낯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결말에서 중요한 것은 영희의 얼굴이 아니다. 우리가 보낸 시선이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는 순간이며, 그것이 부끄럽다는 깨달음이다. 그렇게 영희는 온 사회로부터 강요당한 수치심을 보는 이에게 다시 돌려준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건 영화의 연출이다. 담담한 표정의 영희 사진을 오래 비추는 선택. 그래서 <얼굴>의 마지막은 연출자로서의 연상호가 자기를 갱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은, 이 영화가 이러한 시선과 깨달음을 미리 설계하고 부추긴다는 것이다. "못생겼다"라는 반복적인 말. '똥걸레'라는 자극적인 용어. 보이지 않는 영희의 앞모습. 사진을 보기 전 뜸 들이는 시간. 이 모든 것이 관객으로 하여금 영희의 얼굴을 궁금해하고 마침내 판단하도록 만든다. 그런데 과연 영화는 그런 관객의 반응으로부터 결백하다 말할 수 있을까? 영희를 향한 괴롭힘에 동참한 것은 아닌가? 구조적 폭력을 드러내기 위해 관객을 연루시키는 전략은 좋다. 그러나 그것이 통하려면 '초대'의 선에 머물러야지 '부추김'으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얼굴>은 여전히 훌륭한 작품이다. 폭력적인 시선을 받아야 했던 누군가를 전면에 드러내는 과감한 결단. 결국 시선 자체를 생각하게 만드는 연출. 이런 마지막이 여태 연상호의 필모그래피에 있었던가? 여태 강도 높은 이야기와 강한 장르성을 보여주던 그가 사진 하나로 승부수를 던졌다는 것. 그건 연상호가 <부산행>의 성공을 반복하기보다 새로운 지대로 나아가길 염원하는 연출자라는 사실을 알게 한다. 그의 선택을 지지하고 싶다. 힘을 뺀 저예산 영화이지만 <얼굴>은 그의 어떤 작품보다 생기가 흐른다. 아마도 영화적 시도를 향한 야심이 빚어내는 밝은 기운이 아닐까.


원문 https://premium.sbs.co.kr/article/QyGj3l1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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