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영화란 무엇인가
다른 영화 리뷰들이 밀려있는데, 오늘은 도저히 이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어서 노트북을 켰습니다.
<데어 윌 비 블러드>, <매그놀리아>, <마스터> 등으로 알려진 폴 토마스 앤더슨(PTA)은 지금 미국의 살아있는 거장으로 한국의 박찬욱, 봉준호의 포지션과 비슷하죠. 굉장히 장엄하며 묵직한 이야기를 펼치면서도, 미국 사회의 일면을 날카롭게 버려내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반면 관계와 감정에 집중한 <팬텀 스레드>, <펀치 드렁크 러브> 같은 작품도 너무 훌륭하고요. 기하학적 아름다움 마저 느껴지는 정확한 촬영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칸, 베를린 등에서 일찍이 상을 받아 왔는데,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감독 중 하나입니다. 설명은 여기까지 하고요.
그의 신작을 접한다기에 기대를 하긴 했지만 이런 건 예상을 못했어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빛나는 필모그래피를 갱신하는 그의 새로운 걸작입니다. 여태 작품 중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별점 5점을 줬고요. 속으로 좋아한 작품은 많았지만, 지면에서 별점 만 점을 준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극장을 나오는데 온몸을 두들겨 맞은 느낌이더라고요. ㅋㅋ 영화가 힘들어서가 아니라, 하루 종일 놀이기구를 탄 듯 기분 좋은 몸살이 느껴졌습니다. 실은 아직까지 흥분이 가시질 않네요. 이렇게 흠뻑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는 영화가 얼마만인지 기억도 나질 않네요.
정말 추천하고요. 북미에서도 역대급으로 반응이 좋다고 하는데, 사실 그런 반응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영화는 '진짜'이니까 영화관에서 목격하실 것을 추천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 영화의 무엇이 그렇게 좋은 것인가?
라고 물으신다면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내일부터 시리즈로 글을 올릴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장면 하나하나를 PTA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해석할 때 훨씬 풍성하게 읽을 수 있거든요. 이 영화가 왜 걸작인지를 이해하려면 그의 전작들과 함께 이야기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저의 일이고 여러분은 그냥 편하게 관람하시면 됩니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전작에 대한 이해가 없어도 충분히 재밌게 보실만합니다. 1) 스토리가 흥미진진하고(힘이 있으면서 긴장을 유지하고) 2)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숀 펜 등의 연기가 미쳤고 3) 촬영과 사운드가 끝내줘서 보는 맛이 있습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카 레이싱 장면은 압권입니다.
그래도 전작 하나쯤 미리 보고 싶으시다면, <리코리쉬 피자>(2021)를 추천합니다. 이 영화와 가장 연관성이 커요. "아, 저 장면 전작에서도 봤는데. 느낌이 또 다르네?" 싶으실 겁니다.
보시고 나면 해설을 해 드릴 거예요. 글을 조금씩, 오래 올리겠지만 모든 것을 이야기할 생각이고요,
그 과정이 끝나면 어째서 위대한 작품인지 이해하실 것입니다. 본격 아무도 안 시키는데 사서 하는 고생.. 그래도 이 영화의 포인트가 전달이 안 되는 건 싫어서요.
간단히 소개하자면,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 PTA는 자기가 여태 쌓아온 영화적 질서를 뒤집어 버립니다. 그의 영화에서 나왔던 규율, 관습 같은 것들을 깨고 말이죠. 이것은 포장만 살짝 바꿔서 자기 복제를 반복하며 새로운 작품인 척 연기하는 감독들과 차원이 다른 작업이에요. 이걸 알면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PTA에게 얼마나 큰 변화이자 도전이었는지를 이해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PTA가 변혁을 감수하는 이유는 시대에 응답하기 위함입니다. 그는 지금 미국사회를 분열로 이끈 이유가 차별과 폭력이라 여기고, 그것을 '인종차별'이라는 테마로 응축해 풀어내요. 그는 자기가 여태 쌓아놓은 영화적 질서로는 미국 사회를 제대로 담아낼 수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자기 영화에 사회를 끼워 넣은 것이 아니라, 동시대를 보고 호흡하며 그에 대한 응답으로 영화를 새로 만든 것이고, 그것이 진짜 예술가를 가르는 기준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PTA의 전작에서 등장한 무수한 장면들의 흔적이 스쳐 지나가요. 이거 마치 아름다운 집을 지어 온 건축가가 그 모두를 부순 다음, 여러 조각을 모아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성을 쌓은 느낌이에요. 그 조각들은 제각각 전작을 연상하게 하면서도,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질서 안에서 유려하게 조직되어 있죠. 이것이야말로 필모그래피를 쌓는 의미가 아닐까요.
영화의 시간은 세 시간입니다. 조금 길어요. 길게 느껴지지 않지만요.
그리고 시위, 저항 같은 소재가 등장하는데, 백인우월주의에 대항하는 맥락입니다. 저는 이 영화가 보편적인 가치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느끼지만, 그런 주제나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으시다면 조금 살펴보고 결정하셔도 좋을 것 같아요.
씨네21에 쓴 한 줄 평을 남기며 호들갑을 마치겠습니다.
★★★★★
자기 세계를 거꾸로 뒤집은 PTA의 위대한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