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TA의 지각변동, 그것의 의미는
※ 영화 내용과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지난번에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어째서 걸작인지 말씀드리겠다고 했죠? (아래 관련 글 참고) 그럼, 해설 시작하겠습니다.
이건 첫 번째 레슨. 가장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폴 토마스 앤더슨(PTA) 영화의 대원칙. 바로 '세상은 파워게임으로 이뤄진다'라는 것입니다.
PTA에게 이 세계는 자기만의 파워로 상대를 함락시키려는 전투의 연속이에요. 힘을 과시하는 사람. 매력으로 우위에 서려는 사람. 신을 등에 업은 종교인. 세상을 지배하고픈 엘리트. PTA에게 이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이고, 세상은 게임의 무대입니다(아래 관련글 2.). 그래서 PTA에게 사랑과 전쟁의 본질은 같습니다.
이 원칙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힘은 무엇이죠? 프렌치 75와 정부 군. 퍼피디아 베벌리 힐스(테야나 테일러)의 성적 매력과 스티븐 록조(숀 펜)의 정치적 권력. 통제하고픈 아빠와 달아나고픈 딸. 이 모두가 오가고 중첩되며 펼쳐지는 아수라장. 그것이 이 영화의 근간입니다.
우리는 그 팽팽한 줄다리기 끝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기 위하여 PTA가 펼치는 영화 속에 들어가는 것이죠.
PTA는 이 파워게임의 참가자 중 누구를 일방적으로 편들지 않습니다. 다만 그 아귀다툼 너머로 비치는 미국 사회를 노려볼 뿐이죠.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 석유에 미친 유전업자와 광적인 종교인 중에 PTA의 편은 없습니다. <매그놀리아>는 이토록 못난 갖가지 인간들이 한데 모여, 꽃잎 같은 형상을 이루는 모습을 지켜보는 작품이죠.
다만 PTA도 "이건 선을 넘었다"라고 느끼는 때가 있는 것 같아요. 그건 파워게임의 결과가 '승부'가 아니라 '폭력'으로 넘어가는 지점입니다. <월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도 이런 점은 여실히 드러나는데, 차차 설명할게요.
영화의 가장 첫 장면 기억나시나요?
한 여자가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녀는 어슬렁거리며 걷다가 옆 길로 새고, 곧 자기 동료들을 만나죠.
이런 동선은 PTA만의 인장입니다. 갈 길을 가다가 어느샌가 옆 길로 툭 새 버리는 것. 자기 경로를 기꺼이 이탈하는 행위. 이 우연적이고 낭만적인 동선의 끝에서 늘 새로운 세계가 펼쳐집니다. 마치 앨리스가 토끼 굴에 빠져 이상한 나라에 도착하는 것처럼요. <마스터>의 프레디(호아킨 피닉스)는 그렇게 배에 올랐고, <팬텀 스레드>의 레이놀즈(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알마(빅키 크리엡스)가 있는 레스토랑에 도착합니다.
첫 장면에서 카메라는 퍼피디아 베벌리 힐스(테야나 테일러)의 뒤를 따라갑니다. 즉, 이것은 '곧은길'을 이탈해 '샛길'로 빠진 퍼피디아의 이야기이자, 그녀를 따라 새로운 세상과 마주치는 우리의 여정인 것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등장하는 대사와도 연결돼요. 스티븐 록조(숀 펜)가 퍼피디아에게 직장을 얻으라며 "메인스트림에 온 것을 환영해"라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저의 기억이 맞다면 이 대사에서 '메인스트림'은 (자막에 표시된) 주류 사회를 뜻하기도 하지만, '곧은길'을 상징합니다. 첫 장면에서 퍼피디아가 이탈하기 전에 걷던 바로 그 길이요. 이탈 전의 그 시점으로 돌아가라는 의미지요. 하지만 그녀는 곧은길에도, 샛길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로 그대로 증발하고 맙니다.
또 하나. 이 영화에는 두 개의 동선이 중첩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아요. 1) 화려한 도시 빌딩이 있는가 하면 2) 그 꼭대기에서 추격을 피해 달아라는 프렌치 75 대원들만의 동선이 있죠. 이들은 하나의 공간에 있지만 서로 다른 길 위에서 살아갑니다. 이러한 이중성이 시작 장면에서부터 암시되는 것이죠.
PTA의 영화 주인공들은 모두 파워 게임을 하죠? 그런데 이들 중에 자주 등장하는 스테레오 타입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백인 남성 마초인데요. 이때 '마초'는 PTA 영화에서 자기 힘을 맹신하고 과시하기 좋아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의미로 쓰겠습니다. 엄밀한 의미의 마초와 좀 다르지만요. 이들은 PTA의 세계관의 강자로 자주 등장해요.
대표적인 캐릭터로 <매그놀리아>의 프랭크 맥케이(톰 크루즈)가 있어요. 톰 크루즈의 필모에서 이례적으로 멋지지 않고 (약간 변태적이기까지 한) 역할인데, 자기 남성적 파워에 심취한 인물이죠. 톰 크루즈는 이 역할도 아주 찰떡같이 소화해 내요. 이번 영화에서는 록조가 그걸 이어받습니다. 그 외 가스라이팅하는 종교인, 보수적인 아버지 등 여러 타입이 있지만 생략할게요.
PTA 영화에서 여성은 파워게임의 열렬한 참가자였어요. 하지만 이들은 주로 물리적 힘, 정치적 열세를 극복하며 '반격'하는 위치에 서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향이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 깨어지고, 이것이 이 영화의 핵심 중 하나입니다.
퍼피디아는 기묘한 캐릭터입니다. 여태 캐릭터와 달리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극복할 약점으로 보지 않아요. 오히려 그녀에게 '흑인 여성'이라는 정체성은 무기이며 에너지, 건강한 몸, 무력과 결합하여 그녀에게 최고의 파워를 선사합니다. "흑인 여성을 좋아하지 않냐"라고 묻는 그녀의 자태는 남성들을 압도하죠. 이런 도발성과 또렷한 목표, 과감한 행동력은 그녀를 잊기 힘든 인물로 빚어냅니다. PTA에게 이정표가 될 만한 새로운 캐릭터가 탄생한 것이죠.
다만 퍼피디아에게는 마초적인 면도 있습니다. 자신의 성적 매력과 힘을 과시하고 무기로 거리낌 없이 휘두르는 모습은 여태 등장한 백인남성마초와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PTA는 그의 영화에서 단 한 번도 (성별, 인종, 나이를 막론하고) 마초를 긍정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늘 파국을 몰고 오는 위험한 성향이었어요. 퍼피디아 역시 그녀의 마초적 기질, 힘을 통제하지 못하고 과신한 이유로 비극을 맞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요. PTA의 의도가 "흑인 여성도 마초가 될 수 있다"라는 뜻은 아닙니다. 퍼피디아는 흑인여성마초라는 특성만으로 정의될 수 없죠. 다만 PTA는 거세게 충돌하는 여러 세력 중 하나로, 그녀를 무대 위에 화려하게 데뷔시킨 것입니다.
다만 PTA가 퍼피디아에게 상당한 애정이 있는 것은 맞아요. 그 이유는 1) 그녀가 이례적으로 강인하고 매력적인 여성이기도 하고, 2) PTA가 지랄발광하는 여성 캐릭터에 유독 매력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남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주장과 취향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여성말이죠. <리코리쉬 피자>의 여주가 딱 그런 유형이죠. 이건 이유가 따로 있는 건 아니고 그냥 PTA의 취향 같습니다. 박찬욱이 팜므파탈을 못 잃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또한 퍼피디아가 성적으로 남성을 압도하는 부분은 전통적인 여성 캐릭터의 전형을 깨기 때문에, 이 부분의 쾌감이 상당하죠.
같은 맥락에서 이 영화가 프렌치 75의 폭력을 옹호하는 영화라고 이해될 여지가 있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영화가 때로 록조의 시선을 공유하지만 그를 지지하지 않듯이, 퍼피디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영화는 그녀의 난장을 따라가지만 옹호하지 않고, 윤리의 질서에서 배제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영화에서 삭제하는 최고의 처벌을 내립니다. 이 영화에서 퍼피디아만큼 가혹한 형벌을 받은 사람은 없어요. 이건 그녀가 PTA 세계관의 가장 큰 중범죄(성을 무기로 쓰고 록조를 배신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죽이고 아이를 버렸기 때문)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이건 결국 폭력의 확대일 따름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지금 미국 사회에 대한 PTA의 인식이에요. 너 나 할 것 없이 서로를 때리고 겁탈하는 아수라장. 다시 도래한 폭력의 시대. 이 과정이 유쾌하게 그려지는 이유는 이것이 촌극이자 블랙코미디이기 때문이죠.
이 부분을 잘못 이해하면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부수고 죽이고 잡히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이상한 영화이고, 그 태도에 동의할 수 없으므로 영화도 재미없게 느껴집니다. 제가 해설을 꼭 써야겠다고 생각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거대한 폭력의 얽힘을 냉소하면서도 우려하는 것이 이 영화의 진정한 태도로 보입니다. 다만 이 영화가 절대적으로 믿는 윤리가 또 하나 있는데요. 이 부분은 추후 해설에서 다루겠습니다.
더 쓰려고 했는데 힘드네요.. ㅋㅋ 퍼피디아와 록조, 밥(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다뤄져야 흥미진진한데, 다음 시간에 마저 이야기할게요!
※ 관련 글
1. 첫 별 다섯 개, 흠뻑 빠져버린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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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PTA의 파워게임이 사랑의 방식으로 드러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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