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지' 2월호, 「12가지 마음에 전하는 영화처방전」 코너에 기고한 글입니다.
연초에 썼다는 걸 감안하고 읽어주세요.
2026년, 새로운 해가 시작된 지 얼마간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여전히 낯선 곳에 도착한 사람처럼 어리둥절하다. 2025년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한 적 없다. 하지만 익숙한 것들이 떠나가는 순간은 매번 쉽지가 않다.
그래서 내게 연말과 연초는 설레고도 버거운 시기다. 만남과 작별의 순환은 사람을 감성적으로 만드니까. 아직은 2026년이 낯선 나는, 아직은 2025년에 기대고 싶은 나는 괜스리 달력을 보며 지나가는 시간을 감각해 본다.
시간은 언제나 우리 생각보다 빠르게 흐른다. 쏜살같이 지나가는 자태. 그 찬란함과 무상함은 늘 영화의 좋은 소재다. <탑건: 매버릭>도 그런 작품이다. 원작 <탑건>(1987)이 개봉한 때로부터 무려 35년 만에 돌아온 이 영화는, 그동안의 간극을 외면하지 않고 작품 안에서 끌어안은 채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것은 훌쩍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당혹스러움을 꾹꾹 누른 채로 다시 바쁜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나의 시대는 저물었다'라고 느끼며 급변하는 세상 안에서 길을 잃은 이들에게 이정표가 되어줄 영화이기도 하다. 쌓여가는 시간의 더께에 눌려 지친 당신에게 손을 내밀 영화. 아래부터 <탑건: 매버릭>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다.
해군 항공대 파일럿 '매버릭(톰 크루즈)'은 항공전 학교인 '탑건 스쿨'의 역사에 남는 천재적인 전투 조종사다. 그는 현재 조종사로서 꿈의 속도에 도전하며 살고 있다. 극초음속기로 '마하 9' 속도에 도달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하지만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매버릭도 피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시대'다. 조종사들이 모는 전투기는 무인기로 전환되고 있다. 이것은 시대의 엄중한 요청. 이제 그만 비켜달라고. 인간보다 튼튼하고 정확한 기계에 자리를 내어달라고 말이다. 번쩍이는 금속에 비해 너무도 유약한 인체를 지닌 파일럿의 시대는 끝난 것처럼 보인다.
매버릭은 탑건 스쿨에 교관으로 부임한다. 그리고 적을 무찌를 조종사를 교육하는 임무를 맡는다. 자신만만한 젊은 탑건들에게 매버릭은 '도그파이트(dog fight)' 훈련을 제안한다. 일명 개싸움. 근접 거리에서 조종기로 치고받으며 적을 격추하는 방식이다.
이 영화에서 도그파이트는 꽤 중요한 상징이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이 맞부딪히는 뜨거운 전투를 의미한다. 무인기의 차가운 금속은 흉내 낼 수 없는, 땀과 열기로 후끈한 싸움.
'발전하는 기계 앞에서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에 이 올드보이는 다분히도 육체적이며 인간적인 현장을 들이민다. 점점 더 똑똑해지는 세상에서,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몸을 던지는 일'이라고 말이다.
오랜 세월 속에서 무수한 전투로 단련된 그의 육체, 그리고 생존의 감각. 그는 오로지 자신의 몸을 믿은 채, 거세게 흐르는 시간의 조류를 굳건하게 버텨낸다.
매버릭과 탑건들은 마침내 전투에 나선다. 이 과정에서 전개되는 전략과 화려한 액션이 영화의 백미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매버릭은 퇴역을 앞둔 낡은 F-14 전투기로 압도적인 기량을 자랑하는 적기와 도그파이트를 벌인 끝에 무사히 임무를 마친다.
이때 영화는 조종기의 압도적인 속도를 견디는 매버릭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그의 얼굴은 육중한 중력으로 일그러진 상태다. 영화가 뚫어져라 응시하는 얼굴. 한껏 구겨진 채로 자신에게 가해지는 수난을 묵묵히 견디는 그 얼굴. 이것은 흘러가는 시간과 시대를 정면으로 마주한 채, 온 힘으로 지금을 견뎌내는 인간의 존재를 체화한다.
영화의 마지막, 엉망진창이 된 채로 복귀에 성공하는 F-14 전투기의 모습은 실로 감동적이다. 그건 아마도 F-14이 우리와 얼마간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평생에 걸쳐 제 할 일을 묵묵히 수행해 온 그것은 상처투성이의 낡은 몸체를 이끌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해 낸다. 비행을 마친 후 활주로의 끝에 장렬하게 안착하는 F-14 앞에서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천재 조종사 매버릭을 위협하는 '무인기'는 지금의 AI를 연상하게 한다. 인간을 위협하는 기술은 날로 발전하는 가운데, 느리고 연약하며 시간에 복속된 우리는 무얼 붙잡고 살아야 할까. 그런 의문이 들 때쯤에 매버릭을 생각한다. 어찌 될지 모를 운명 앞에서 그저 몸을 던져 하루를 살아내는 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인간 조종사는 결국 사라질 것이라는 말에 대한 매버릭의 답을 여기 남기며 글을 마친다.
"Not today(오늘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