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지' 3월호, 12가지 마음에 건네는 영화 처방전
※'법무사지' 3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최근 국내에서 화제가 된 연극이 하나 있다. 3월 말까지 상연하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그것이다. 이 연극은 동명의 애니메이션을 극화했다. 우리 모두가 아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그 명작. 아마도 기억 속에 자리 잡은 그 판타지를 무대 위에서 생생하게 체화해 내는 기술과 감동이 이 연극의 동력이 아닐까 짐작한다.
연극으로 재탄생한 작품 앞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원작 애니메이션의 끈질긴 생명력이다. 일본에서 2001년 개봉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2020)이 등장하기 전까지 20여년 간 역대 일본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다.
지브리 작품 중에서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크게 흥행했고, 제52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역량은 흥행 스코어, 수상 이력 등에 머물지 않는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품은 큰 세계는 이 작품을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기에 충분하니 말이다.
여느 명작이 그렇듯, 이 영화도 다양한 갈래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중심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테마는 '자아를 지키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센과 치히로. 제목에 포함된 두 개의 이름도 그것을 지시하니 말이다.
그러므로 오늘은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고전하는 이들을 위해 글을 썼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영원히 지키고 싶었던 나를 잊을까 봐 두려운 당신을 위해. 새로운 세계에서 생존하기 위해 안간힘 쓰다가도 문득 지난날을 돌아볼 이들을 위해. 영화가 센과 치히로 사이를 오가는 그 좌충우돌의 시간을 성장이라 할 수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이 영화는 아릿한 성장통을 견디기 위한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다. 아래부터 결말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다.
오프닝이 훌륭한 영화는 많다. 하지만 나는 모험의 시작을 가장 잘 표현한 오프닝으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꼽겠다. 엄마, 아빠와 타고 가는 차 뒷자석에 누워 창밖을 나른하게 구경하는 어린아이. 평범하고 평화로운 순간. 그러다 차는 우연히 외딴 길에 들어서고, 정신없이 질주한다. 곧이어 차는 산속에 난 터널 앞에 마법처럼 도착한다.
통상 영화에서 모험의 시작을 알리는 장면들은 신나고 쾌활하다. 하지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다르다. 유려하고 서정적인 동시에 낯설고 두렵다. 실로 아름다운 이 순간은 어떤 모험도 흥분과 즐거움만으로 이뤄질 수 없으며, 거기에는 헤맴과 망설임, 그리고 통증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한다.
치히로의 모험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신들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이다. 온천장의 주인 유바바는 치히로를 '센'이라 명명한다. 이렇게 그녀는 옛 이름을 잃고, 새 이름으로 이곳의 생활을 시작한다. 이러한 설정은 인생의 단면을 예리하게 관통한다. 우리는 인생의 주요한 순간마다 새로운 세계에 진입한다. 새로운 학교. 새로운 직장. 우리는 그곳에 적응하기 위해 새 정체성을 입는다. 과거의 나와 닮았지만 많이 다른 정체성을. 영화는 그것을 치히로의 새 이름, '센'으로 포착한다.
새 이름은 분명 생존에 더 유리하다. 하지만 그 이름에 매몰되는 순간 우리는 과거의 자신을 잃고 만다. 영화에서 자기 이름을 잊은 채 오로지 온천장의 일원으로서 살아가는 이들처럼. 그것을 일깨워 주는 이가 바로 '하쿠'다. 원래 이름을 잊으면 돌아가는 길을 잃게 된다고 말이다.
하쿠의 정체는 의미심장한데, 치히로가 어렸을 때 빠졌던 강이다. 치히로가 하쿠의 본명(강의 이름)을 알려주며 그 역시 유바바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 서로를 아끼고 염려하는 이들의 마음. 그것이야말로 현재에 매몰된 채 과거를 잊고 살아가는 우리를 위기에서 구출해 낸다.
영화에서 치히로와 하쿠의 관계는 하나의 단어로 압축되지 않는다. 하쿠는 치히로의 첫사랑이자 동료이고, 스승이자 부모다. 혹은 그 무엇도 아니다. 다만 이들이 과거에 순수하게 반짝이던 순간을 공유했으며, 그 힘으로 현재에도 서로를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 만은 분명하다.
무엇이라 부르든 상관없어. 그 마음이 우리를 구원할 테니. 나를 지키는 일은 지키고 싶은 시절을 기억해 주는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비로소 가능하다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속삭인다. 우연히 빌린 비디오를 가족과 넋 놓고 바라보았던 시절이 생각난다. 내게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가 그런 존재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