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씨네21>에 기고한 비평문은 아쉬운 부분에 중점을 두었지만, 제게 <어느 가족>은 그 성취가 인상 깊은 영화이기도 합니다. 이 공간에서 영화에 대한 애정을 고백할 수 있어서 기쁘네요.
1. 아이들만의 세계
<어느 가족>은 특별한 가족의 아름다운 한 때를 그리되, 마지막에 이르러 어른과 아이의 세계가 미묘하게 분리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가장 어른인 하츠에 할머니는 스스로를 구제하는 데 가장 익숙하며(보험을 들고, 이 가족 안에서 생을 마감함) 오사무와 노부요는 각자 스스로의 길을 선택하고 나아갑니다. 아직 미숙한 아키는 가족들의 비밀을 뒤늦게 전해 듣고서 혼란스러워하죠. 반면 가장 어린아이들은 행로가 불분명한 길 위에 홀로 남겨집니다. 하나의 공동체로 보였던 이들 사이에도 서로 다른 층위가 존재하는 것인데요, 어른일수록 이 공동체의 해체를 익숙하게 대비하는 반면, 어릴수록 그 순간에 무력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동스러운 것은 이 영화가 어린 쇼타와 유리 사이의 연대를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 유리가 이불에 실례를 하고서 가족들에게 "죄송합니다"란 말을 되풀이할 때, 이 장면은 쇼타가 웅크리고 지내던 작은 벽장의 시선에서 포착됩니다. 어수선한 가족들 틈에서 위축된 채 곤란해하는 유리의 모습은 누구보다도 쇼타가 가장 먼저 발견하는 것이죠. 혹은 쇼타가 유리에게 시선을 보낼 것임을 예고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다음부터 쇼타는 끊임없이 유리를 생각합니다. 유리의 상처가 화상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아이를 밖에 내버려두는 이는 좋은 엄마가 아니라는 것을 가장 먼저 지적하는 사람은 쇼타입니다. 또한 쇼타는 유리의 의사를 자주 물어보기도 합니다. 집에 돌아가도 좋다고 말하고, 이 가족 안에서 적응할 수 있겠냐고 묻기도 하죠. 쇼타는 도둑질에 익숙해져가는 유리를 걱정하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쇼타와 유리가 '매미 유충'을 응원하는 장면을 통하여 그들이 서로를 응원하고 있음을, 또한 영화들가 아이의 세계를 응원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작은 벽장 안에서 유리구슬을 보며 각자 '바다', 그리고 '우주'를 떠올리는 장면은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일 것입니다.
마지막에 이르러 유리는 어딘가를 유심히 바라보는데요, 만일 그녀가 본 것이 유리를 찾아온 누군가라면 그것은 분명 쇼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유리를 걱정한 오빠 쇼타 말이죠.
2. 쇼타의 갈등을 보여주는 장면
영화에서 쇼타가 갈등을 겪는 모습은 꽤 다양하게 드러납니다. 그중 하나가 참치를 물리치는 작은 물고기들을 이야기하는 장면입니다. 쇼타는 힘을 합쳐서 큰 참치를 물리치는 작은 물고기들에 대한 이야기를 오사무에게 하는데요, 이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작은 물고기'들을 이 가족으로, '큰 참치'를 이들의 반대에 선 사회 제도로 연결 짓게 됩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쇼타의 질문은 뜻밖입니다. 그는 "참치에게 그래도 돼?"라고 물어보죠. 쇼타는 작은 물고기들의 승리보다는 참치를 물리치는 행위의 도덕성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에 오사무는 "참치가 물고기들을 괴롭혔으니 괜찮다"는 식의 말을 합니다. 정해진 규율보다 심리적인 설득력에 집중하는 셈입니다. 이 짧은 대화는 쇼타와 오사무의 관점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 가슴이 아픈 것은, 이들이 가로등 아래에서 참치와 물고기를 흉내 내며 장난치던 장면이 유독 아름답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사무가 아이들에게 손수건이 사라지는 마술을 보여주던 장면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마술 트릭을 둘러싸고 가족 구성원들의 성격이 드러나는데요, 아빠 오사무는 손수건을 아이들의 눈에 안 보이는 곳에 숨기고서 이를 마법이라고 말합니다. 이때 카메라는 오사무가 손수건을 자신의 몸 아래에 숨긴 것을 모두 보여줍니다. 오사무는 평소에도 '아빠'라는 호칭이나 '아들과의 공놀이' 같이, 자신을 아빠로 보이게 만드는 부분에 많은 애착을 보이죠. 그에게는 부자관계의 외향적인 부분이 중요한 것입니다. 반면 노부요는 오사무가 감춘 손수건을 장난스레 꺼내서 아이들에게 보여주는데요, 이것은 그녀는 현실적인 모습과도 연결됩니다. 노부요는 쇼타에게도 호칭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죠. 어린 유리는 아빠의 마술을 마냥 보고 있는 반면, 쇼타는 흥미로운 반응을 보입니다. 그는 마술의 트릭을 알고서 "에이 뭐야 별거 아니네"라는 말을 하고, 아빠 오사무가 떠난 자리에서 작은 주머니에 숨겨져 있던 손수건을 빼내어 쳐다봅니다. 눈속임과도 같은 이 가족의 비밀을 쇼타가 응시하기 시작하였으며, 그가 이 가족의 비밀을 외부로 노출시킬 것을 암시하는 부분입니다. <어느 가족>의 흥미로운 점은 이처럼 가족 간의 작은 에피소드에서도 구성원들의 성격과 그들이 처한 상황, 그들의 생각이 자연스레 묻어난다는 점입니다.
3. 상점의 할아버지
이 영화에서 제가 큰 감동을 느낀 장면이 있습니다. 상점의 할아버지가 도둑질을 하는 쇼타를 부르고서 먹을 것을 주며 "여동생에게는 시키지 마"라고 하던 장면인데요, 이 장면에서 정말 인상 깊은 것은 다음 부분입니다. 이 할아버지는 쇼타가 여동생에게 시켜서는 안 될 행동을 가리키며 "도둑질"이라고 하지 않고 쇼타의 수신호(손을 돌리고 머리를 치는 제스처)를 그대로 따라 합니다.
생각해보자면 오사무와 아이들은 무언가를 훔칠 때에 "도둑질"이란 단어 대신 이 제스처를 하고, "훔친다"는 표현 대신 "구조한다"는 용어를 씁니다. 사회적 맥락에서 금지와 비난의 어조를 담은 어휘(도둑질, 훔침)를 피하고, 그들 나름의 자체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 의도는 쉽게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회적 비난을 감당할 행위가 아니라 "버려진 것을 구조하는", 혹은 "남는 것을 적당히 쓰는" 행위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겠죠. 이런 생각은 후반부에 노부요의 발언("버린 것을 주웠을 뿐입니다.")을 통해서 다시 한번 발화됩니다.
감동적인 것은 상점의 할아버지가 이 가족의 언어(제스처)를 따라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법제도가 미치지 않는 야생의 영역에서 그들 나름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의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쉽게 상처입을 어린 아이들에 대한 배려로도 볼 수 있겠죠. 그는 위법적이지만 큰 해를 입히지 않는 아이들에 대하여, 그들의 행위가 언젠가 중단되어야 함을 부드럽게 경고합니다. 그래서 이 할아버지의 죽음(상점에 부고가 붙은 장면에서 추측함)은 많은 의미를 지닙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상점이 문이 닫힌 바람에 아이들이 자리를 옮겨서 찾아간 마트에서 결국 사건이 터지는 것이죠. 이 마트는 할아버지의 상점과 다르게 제도의 외부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포용할 생각이 없습니다. 이것은 그 행위의 정당성을 떠나서, 현재 일본 사회에 대한 고레에다의 냉정한 진단으로 보입니다. 변칙적으로 살아가던 이들을 이해하며 그들과의 공생을 고민하던 시절은 끝나가고 있음을 고레에다는 감지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무심한 표정으로 아이들의 수신호를 따라 하며 먹을 것을 건네주는 노인의 온화한 태도는 더욱 오래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