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른도감>, <살아남은 아이>, <죄 많은 소녀>는 상반기에 개봉하며 많은 기대를 받았던 독립 극영화들이다. 이에 대한 짧은 평과 더불어 세 영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인상에 대하여 적어보려고 한다.
세 영화에 대한 평
먼저 <어른도감>의 경우 열네 살 경언(이재인)이 생면부지의 삼촌인 재민(엄태구)을 만나서 벌어지는 일들을 코믹하고도 안정된 톤으로 그린다. 그런데 이 안정된 톤이 강점이자 약점이 된다. 영화는 매끄럽고도 능숙하게 흘러가지만 그 안정감이 기시감으로 느껴지는 지점도 있다.
<살아남은 아이>는 자신의 속도를 유지하며 뚝심 있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상실 앞에 선 인간의 표정을 생소한 눈으로 지켜보는 장면들이 눈에 띄며, 배우들의 연기는 빈틈이 없다. 특히 김여진과 최무송의 연기는 인물을 우리에게 설득하는 동시에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이끌고 간다. 그러나 영화가 세 인물을 한 자리에 모으는 과정이나, 미숙(김여진)을 대하는 방식에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미숙의 모성애와 관련하여 더욱 풍부한 시선을 담을 수 있지 않았을까.
<죄 많은 소녀>는 장점과 단점이 뚜렷한 영화다. 영화는 다양한 시선과 기억을 통하여 이야기를 진행하며, 익명성을 띈 소녀들의 군상을 그리는 것에 탁월한 모습을 보인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어슬렁거리며 영희를 찾는 소녀들의 여린 실루엣은 색다른 공포를 전달한다. 반면 유리창을 통하여 인물을 건너다보는 연출이 다소 자주 반복되는 것 같다. 미지의 상대를 건너보는 시선은 다양하게 드러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폭력의 언어가 인물들에게 외상을 남김을 보여주는 장면들(폭언을 들은 후 토를 하는 경민의 엄마, 의심받은 후에 영희가 보여주는 피)은 다소 직접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세 영화를 관통하는 공통점
이 영화들은 모두 누군가의 죽음으로 시작되며, 그 죽음과 가장 가까운 이들은 서로 유사가족을 이룬다. 유사부녀가 되는 <어른도감>의 재민과 경언은 말할 것도 없고 <살아남은 아이>와 <죄 많은 소녀>에서는 희생된 아이의 친구와 그 부모가 유사가족이 된다. <죄 많은 소녀>에서 경민의 엄마에게 시종 시달리는 영희에게는 엄마가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상실을 극복하기 위하여 세상의 이곳저곳을 떠돌지만, 종국에는 그들만의 만남으로 끝을 맺는다. <어른도감>은 삼촌과 조카의 재회로, <살아남은 아이>는 바닥에 쓰러진 세 명의 모습으로, <죄 많은 소녀>는 경민 엄마에게 마지막을 새기고서 길을 떠나는 영희의 모습으로 끝이 난다. 그들이 상대에게 던지는 감정이 애정이든(<어른도감>), 미약한 희망이든(<살아남은 아이>), 적의와 복수심이든(<죄 많은 소녀>)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야 영화가 끝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간혹 영화적인 장력이 느껴지기도 한다. <어른도감>의 경언이 엄마의 집에서 무엇을 보았는지에 대하여 영화는 침묵한다. 그리고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삼촌의 곁에 돌아온다. 그 회귀의 과정이 지나치게 간단한 것은 아닐까. <살아남은 아이>의 주인공 셋이 마지막에 만나는 이유는 기현(성유빈)이 성철(최무송)과의 만남을 도배팀장에게 자랑하였고, 이를 미숙(김여진)이 전해 듣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들을 죽게 하였다는 고백을 한 후 그 아버지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고서, 기쁜 나머지 이를 주변에 자랑했다는 설정은 다소 어색한 구석이 있다. 이 장면은 오히려 미숙을 마지막 자리에 부르기 위한 것으로 느껴진다. 그 느슨함을 결함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아니며 다만 여기에 인물들을 당기는 장력이 존재함을 언급하고 싶다. <죄 많은 소녀>의 경우 영희는 그녀가 받은 폭력을 경민 엄마와의 문제로 수렴시킨 채 어디론가 떠나간다.
그리고 이 마지막에는 공통적으로 어떤 폐쇄성이 엿보인다. 영화는 상처받은 이들만의 연대, 혹은 지옥도를 강조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잠시나마 폭력적인 외부로부터 그들을 안전하게 분리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들이 사회로부터 거듭 상처받고 버림받은 후 종국에는 서로를 바라보며 끝이 날 때, 내게는 그 좁은 결속의 안온함보다 폐쇄성이 더욱 눈에 들어온다. 이들은 모두 외부와의 화해는 의문으로 남긴 채 서로를 마주 보며 웃거나(<어른도감>) 기진맥진하거나(<살아남은 아이>) 복수의 눈빛을 보내며(<죄 많은 소녀>) 끝을 선고한다. 이들은 아직 외부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는 것일까, 그것에 무관심한 것일까, 혹은 마지막 희망마저도 모두 져버린 것일까.
비슷한 시기에 우리 앞에 도착한 세 편의 영화를 보며, 그리고 세계와 단절하는 인물들의 마지막을 보며 내가 생각한 것은 두 가지다. 첫째로 이 영화들을 관통하는 폐쇄성을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을까. 이것은 타인, 그리고 다른 세계와의 접촉에 대한 우리의 폐쇄성을 드러내는 지표는 아닐까. 비극이든 희극이든 그 결말은 우리만의 것이며 타인과 공유할 수 없다는 생각이 지금의 한국을 떠도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현실과는 별개로, 이 영화들이 너무 성급하게 세계에 대한 문을 닫아버린 것은 아닐까. 이것은 영화의 닫힌 '결말'이 아니라 닫힌 '세계'에 대한 언급이다. 영화가 그들이 창조한 인물과 세계(그것이 비록 폭력적이라고 해도) 사이의 가능성을 너무 일찍 포기한 것은 아니냐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우리가 영화를 시시한 농담이 아닌 살아 숨 쉬는 독립적인 세계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영화가 스스로의 세계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책임지기 때문일 것이다.
폭력적인 세계에서 소통은 아프고 접촉은 쓰라리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여전히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안전하게 유폐된 공간에도 미래가 있을까. 내부로 수렴하는 상처받은 인물이 광활한 외부로의 시선을 잊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영화가 이런 고민에 응답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