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일런스> 비평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믿음과 신념에 관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게 다라면 이 영화는 지나치게 길다.
계속해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두 번째 보았을 때, 영화가 나아가고자 하는 지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신할 수 있는 것은, 이 영화는 자신이 가진 역량을 과소평가받고 있다.
이 글이 독자들을 영화가 품은 세계의 입구에나마 인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사일런스>는 의미와 상징이 뒤틀어진 세계에 도착한 한 인간에 관한 영화다.
처음 로드리게스(앤드류 가필드)와 가루페(아담 드라이버)가 등장하는 곳은 발리그나노 신부(시아란 힌즈) 앞이다. 그들은 페레이라 신부(리암 니슨)와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이들의 대화는 후반부에 등장하는 이노우에와의 대화와 다르게 물 흐르듯 흘러간다.
그 이유는 이들의 신념이 같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하게는 그들이 공유하는 상징과 의미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쉽게 이야기해 보자.
이 곳에서 페레이라 신부는 종교적 스승이며, 가톨릭은 목숨을 바쳐야 할 신념의 대상이고, 일본은 종교적 불모지이자 박해의 땅이다.
'페레이라 신부', '가톨릭', '일본' 등의 단어들이 단순한 지칭을 넘어, 하나의 동일한 의미를 담고 그들 사이를 오간다. 이러한 의미와 상징의 연결은 맥락을 만들어낸다.
동일한 맥락 하에서의 대화는 막힘이 없다.
로드리게스 역시 자신만의 상징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의 초상이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 로드리게스에게 예수의 초상은, 자신을 굽어살피는 예수님의 얼굴이자 흔들리지 않는 종교적 믿음의 상징이다. 이러한 상징(예수의 초상)과 의미(굳건한 믿음)의 결합은 일본이라는 낯선 땅에서 위기를 맞게 된다.
로드리게스와 가루페가 일본에 도착하여 처음 마주치는 것은 낯선 일본 노인의 얼굴이다.
어두운 동굴에서 불쑥 드러난 그 얼굴은 어떠한 의미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두려움을 자아낸다.
그러나 곧이어 성호를 긋는 노인의 동작은 그에 대한 경계심을 풀게 한다.
비단 노인의 얼굴뿐만이 아니다.
로드리게스 일행은 도모기라는 작은 마을에서 무수한 낯선 기표들과 마주친다.
신부를 의미하는 '파도레', 크리스챤을 의미하는 '기리스탄', 크리스천을 박해한다는 '이노우에' 수령, 그들을 옆 마을로 인도하는 뱃사공들의 '무표정한 얼굴'.
이것들은 단순히 일본이라는 낯선 장소 때문에 등장하는 설정이 아니다.
영화는 쏟아져 나오는 낯선 기표들을 신부들이 처음 영접하는 순간의 당혹감과 위화감을 그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들 사이의 대화도 종종 번역되지 않은 채로 영화에 등장한다.
영화에서 이노우에 일행이 처음 등장할 때, 안갯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집행자들의 모습은 알 수 없는 이국적 기표를 시각화하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낯선 기표를 만나는 것은 신부들만이 아니다.
도모기의 일본인들 역시 새로운 상징과 마주한다.
그들은 로드리게스 일행에게 믿음의 증표를 주길 요구하는데, 십자가나 묵주 등을 열정적으로 받아 드는 일본인들의 모습은 어쩐지 불안감을 자아낸다.
그 불안감은 일본의 신도들과 로스리게스 일행이 상징에 대하여 가지는 미묘한 온도차에서 비롯된다.
십자가라는 기표에 따르는 기의가 다를 수 있다는 불안감.
너와 나의 믿음이 다를지도 모른다는 의심.
이 생각은 로드리게스의 내레이션으로 다시 한번 확인된다.
로드리게스 일행과 도모기 부락민들 사이에서도 서서히 맥락의 미묘한 불일치가 드러난다.
이를 보여주는 하나의 장면이 있다.
로드리게스 일행이 젊은 일본인 부부의 아이에게 세례를 주던 장면.
이 장면에서 부부는 이제 아이가 주님의 품의 안겼냐는 취지의 질문을 하는데, 이에 가루페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며 다만 신은 늘 우리의 곁에 있다고 대답한다.(정확하게 동일하지는 않을 수 있다.) 이들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흐른다.
가루페는 스스로 서투른 신부라고 자책하지만, 이것이 저 삐그덕 대는 대화의 원인은 아니다.
젊은 부부는 세례라는 상징으로부터 천국이라는 의미를 바로 연결시키고 싶다.
그러나 가루페는 자신이 생각하는 믿음의 정확한 의미를 이들에게 전달하고 싶다.
여기서 '세례'라는 하나의 상징에서도 두 인물들이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 미묘한 불일치에서 오는 불안감이 이 장면의 어색한 침묵의 공기로 표현된다.
로드리게스 일행이 도모기에서 접하는 낯 모를 기표들.
이는 반가운 이질감이 아니라, 낯선 것들의 범람이다.
그것들은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기에 두렵다.
혹은 동일한 의미를 공유한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정확히 일치하지 않고 어딘가 미묘하게 어긋나는 기분 나쁜 불협화음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맥락의 어긋남은 이노우에 앞에서 본격적으로 심화된다.
로드리게스 일행이 지녀온 맥락(상징-의미의 연결체계)은 위기에 봉착하는 것이다.
새로운 맥락의 제시
이노우에는 천주교 사회가 지녀온 맥락을 거부한다. 대신 그들은 새로운 맥락을 제시한다.
이노우에에게 천주교는 굳건한 신념이 아니라 처리해야 할 '행정적 과제'이며, 크리스챤에 대한 배격은 박해가 아닌 '정책적 선택', 순교는 성스러운 죽음이 아닌 '실패한 전략', 배교는 신념의 배반이 아닌 '일본이라는 나라와의 화해'이며, 배교하지 않는 것은 영웅적 행위가 아닌 '자기를 위해서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이기적 행동'이다.
무엇보다 가장 새로운 맥락으로서 제시되는 것은 이노우에 자신이다.
이노우에 스스로 자신이 그 '이노우에'임을 밝히던 장면.
이때 극악무도한 박해자의 의미로 소용된 '이노우에'라는 기표는 나이 들고 온화한 노인의 얼굴과 강렬한 충돌을 일으킨다.
원서에서는 이때 통역관이 이노우에를 소개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이노우에는 본인의 입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주름진 인자한 얼굴의 노인이 직접 '이노우에'를 발화할 때의 불일치.
여태껏 유지해 온 기표와 기의가 강렬하게 분리되는 순간이 이 장면에 존재한다. 이는 소리와 이미지가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영화적 순간이다.
맥락 쥐고 흔들기
이노우에는 단순히 고통을 주는 방식으로 배교하기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는 새로운 맥락을 제시하며, 로드리게스가 평생 품어온 맥락을 뒤흔든다.
이노우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로드리게스가 지닌 기표와 기의 사이의 연결을 느슨하게 만든 다음, 기표만을 따로 떼어 생각하도록 만든다.
이노우에가 계속해서 말하는 "배교 행위는 형식일 뿐이다."는 말이 그것이다.
이노우에는 의미와 분리된 상징의 개념을 알고 있다.
그 근거가 되는 장면은, 십자가에 침을 뱉도록 했을 때 이노우에의 반응을 담은 짧은 장면이다.
그는 기치지로가 시키는 대로 십자가에 침을 뱉자,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린다. 얕게 안타까움의 탄식도 내뱉는다. 이노우에는 이 배교의 순간에 즐거움이나 승리감을 느끼는 대신 배교자들의 괴로움에 공감하고 있다. 이는 이노우에가 이들의 종교적 신념을 감정적으로 이해하며, 다만 행정적 절차로서 종교 검증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종교적 신념을 마음속에 품었는지보다(의미) 표면적으로 크리스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상징)이 이노우에에게 중요한 것이다.
그 외에도 여전히 크리스챤이 많이 남아있다는 이노우에의 다정한 말, 배교 행위는 단순히 형식일 뿐이라는 이노우에의 줄기찬 설득으로 볼 때, 이노우에는 '이 마을에 기리스탄 없음'이라는 형식적 표지가 유지되길 바랄 뿐이다.
이노우에는 기본적으로 의미와 상징에 대한 이해에서 로드리게스보다 한 수 위에 있다.
그는 로드리게스가 지녀온 의미-상징의 맥락을 비틀고, 로드리게스의 상징들을 자꾸만 다른 의미에 연결시킨다. 혹은 의미를 없애버리고 상징을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이게 한다.
로드리게스에게 일본은 낯선 맥락이 거대한 또아리를 틀고 있는 공간이자, 자신의 맥락이 위험에 처하는 운명적 장소다.
맥락의 뒤틀림
로드리게스는 자신의 상징들이 예상치 못한 의미와 결합되는 것에 괴로워한다.
'페레이라'가 종교적 스승이 아닌 배교자로 통용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고통이다.
맥락의 뒤틀림은 로드리게스가 배교하기 직전에 최고조에 달한다.
그가 나무 위에 새겨진 글귀를 매만지며 마지막 희망을 다잡자, 페레이라는 그 글귀를 자신이 새겼다고 말한다. 신의 응답이라고 믿은 것은 다른 배교자의 과거일 뿐이다.
그가 간수의 코 고는 소리를 비난하자마자, 이 소리가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린 사람들의 신음소리임이 밝혀진다.
가장 소중한 것과 가장 혐오하는 것이 하나의 상징을 공유하는 이 극단적 뒤틀림.
이 뒤틀림은 결국 로드리게스를 선택의 순간으로 인도한다.
이 곳에서 로드리게스는 자신의 맥락과 이노우에의 것 중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한다.
두 가지 기로 사이에서 방황할 때, 그가 지녀온 상징들은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다.
십자가는 완벽한 믿음의 증거가 돼주지도 못하지만 그렇다고 이기심의 발로도 아니다.
이때, 십자가는 그저 십자가로서 그 자리에 존재한다.
상징이 두 가지 맥락 중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고 중간쯤에서 어중간하게 존재할 때, 상징은 그저 의미없는 기표로서 존재한다.
기도는 소리로서 공간에 흩어지며, 예수님의 초상은 아무런 응답이 없다.
영화상에서 신의 응답은 '새'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가루페는 매를 보고 신의 은총이라고 하고, 로드리게스가 모키치의 손을 잡고 기도하던 순간 새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새소리는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믿음과 상관없거나 심지어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에 들려온다는 것이다. 새라는 상징은 믿음이라는 의미와 점차 분리된다.
기의와 분리되어 떠도는 기표들.
통상 상징은 의미를 환기한다.
의미가 탈락된 심벌은 아무것도 환기하지 못하므로 그곳에 존재하는 것은 정적뿐이다.
맥락이 뒤틀어져 의미와 상징이 분리된 곳에서, 오로지 상징만이 고요하게 존재하는 상태.
그것이 영화가 말하는 '사일런스'다.
로드리게스는 결국 이노우에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성화를 밟는다.
그런데 이 행위는 단순한 배교가 아니라, 로드리게스가 지녀온 맥락(의미-상징 체계)이 이노우에의 것에 패배함을 의미한다.
그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이 로드리게스가 성화를 밟는 순간이다.
로드리게스가 성화를 밟고서 짧은 페이드아웃으로 예수의 초상이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부분은 원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 장면은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를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결정적 장면이다.
예수의 초상은 로드리게스가 지녀온 맥락을 대표한다.
이 얼굴은 늘 굳건한 믿음을 상징해왔다.
평온한 환경에서 문제없이 간직해 온 상징은 일본에서 위기를 맞고, 점차 그 초상은 아무 의미도 전달하지 않은 채 오로지 침묵만을 전한다.
그리고 로드리게스가 성화를 밟은 순간, 이 얼굴은 단순히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사라지듯 페이드아웃된다.
로드리게스의 맥락은 이 순간 완전한 패배를 맞는다.
이후 영화에서 예수의 초상은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상에서 일본이 제시하는 맥락은 폭력적이고 강박적이다.
이 맥락에서 탈출하여 자신만의 의미-상징체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있었다.
로드리게스의 시도
로드리게스는 성화를 밟을 때 이것을 밟으라는 예수의 음성을 듣는다.
시기상 이 음성은 믿음이 흔들려 감정적으로 취약해져 있고, 사람들의 신음소리와 페레이라의 회유에 못 이겨 배교하기 직전에 들려온다.
이 음성은 로드리게스가 결정을 고민하기보다 이미 선택한 스스로의 결정을 합리화하려는 타이밍에 등장한다.
로드리게스는 스스로 만들어낸 새로운 의미의 체계를 예수의 음성으로 듣는다.
이제 그는 성화를 밟는 행위에 대하여 '배교'도 아니고 '일본과의 화해'도 아닌, '예수의 허락'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스스로 부여한다.
이것이 배교자의 자기 합리화인지 나름의 신념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가 천주교와 일본 어느 쪽도 아닌 자신만의 의미 체계를 만들려고 시도하였다는 것이다.
로드리게스는 이후 어떠한 상징도 거부한다. 잠시동안 그는 맥락없이 살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말에 이르러 십자가를 손에 꼭 쥐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결국 그가 이전의 맥락으로 회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사람이란 상징과 의미가 연결된 하나의 체계를 떠나서 홀로 존재할 수 없다.
로드리게스가 마지막까지 십자가와 칼, 두 개의 상징을 품에 안고 죽음을 맞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는 죽어서도 천주교와 일본, 어느 곳의 맥락에서도 자유롭지 않다.
두 개의 맥락 사이를 오가는 자, 기치지로
영화에서 기치지로는 두 맥락 사이를 자유로이 오간다.
그는 카톨릭을 믿었다가도, 필요할 때는 언제든 배교의 제스처를 취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꽤나 혐오스러운 것으로 그려진다.
기치지로가 혐오스러운 것은 그가 로드리게스를 밀고하였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맥락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자신이 원하는 위치에 언제든 설 수 있다.
이러한 자유로움은 하나의 맥락을 선택하기를 강요받는 로드리게스의 부자유와 정반대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시선에서 기치지로는 혐오스러울 수밖에 없다.
상징이 침묵한다는 것, 그것은 상징이 아무런 의미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때 고통의 무게는 의미 없음의 무게다.
로드리게스는 확고한 믿음의 세계에서 온 자다.
그는 익숙한 상징들이 거대하고 숭고한 의미와 결합하는 곳에서 살았다. 그런 그에게 의미 없음은 지옥과 같은 것이다.
로드리게스는 아마도 주의 영광을 위해 죽으라는 맥락이 확고하였다면, 고민 없이 죽음을 택하였을 것이다.
그가 괴로운 이유는 고통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 의미가 불확실해졌기 때문이다.
기도가 신과의 소통이 아닌 혼잣말이 되었을 때, 자신의 기도소리를 듣는 것은 차라리 고문이다.
자신만의 신념을 가져본 자들은 누구나 신념이 흔들릴 때의 괴로움을 안다.
괴로움은 박해와 같은 확고한 얼굴로 다가오지 않는다. 대신 그 괴로움은 의미를 반문하는 부드러운 질문에서 시작된다.
자신의 행위가 어떤 의미에도 가닿지 못하고 공중에 떠 있음을 느끼는 순간.
그 지난한 침묵의 공포를 마틴 스콜세지는 안다.
그러므로 그의 진짜 관심은 믿음의 회복이 아니라 침묵의 지속, 그 무서운 정적의 순간에 있다.
결국 <사일런스>는 침묵의 한가운데 서 있는 자들에게 스콜세지가 건네는 한 편의 서늘하고 아름다운 위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