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홍수정 Mar 08. 2017

이 영화는 달빛을 닮았다

영화 <문라이트>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이 영화는 달빛을 닮았다.

지금 우리의 머리 위에도 떠있는 저 달 말이다.

세상 어느 곳에나 포근하게 내리쬐는 달빛은 흑인 아이와 만날 때 푸르스름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차박차박, 리틀이 후안의 품에 안겨 수영을 배울 때 이들을 품는 바다도 푸르다.

그 바다는 마치 지상에 내려와 고인 달빛 같았다.



흑인 성소수자에 대한 영화라는 얕은 정보를 듣고서 영화를 보고 난 후 가벼운 당혹감이 몰려왔다.

내가 본 것은 비장한 주장이 아닌 한 편의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다.

<문라이트>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지 않는다.

그저 조용하게 한 흑인 소년의 감정을 흘리고 지나간다.

흑인이 처한 현실은 엄마와의 관계로, 동성애자가 겪는 통증은 아픈 짝사랑으로 샤이론의 감성에 알알이 박혀 든다.

이 영화는 흑인과 백인, 동성애자와 이성애자를 대비하며 그들의 현실을 조망하기보다 그들의 안 깊숙이, 아주 깊숙이 침잠하여 한 소년의 감성을 섬세하게 더듬는다.

 


한 소년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것.

그것이 이 영화가 인종과 성애를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영화는 흑인과 동성애의 개별성을 최대한 흐릿하게 지움으로써 그 아래 놓인 보편성을 수면 위로 드러낸다.

혹은 그저 인종, 성애 같은 무거운 주제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이러한 영화의 화법이 역설적으로 우리 시선의 개별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흑인, 동성애에 대한 우리의 이질적인 시선.

그 시선은 소년의 오랜 감정을 따라가는 영화의 섬세한 손길 앞에 무너진다.

달빛이 피부색에 대한 고정된 시선을 해방시키듯, 영화는 사랑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자유롭게 한다.



흑인 아이들은 달빛 아래에서 푸르게 보인단다.

할머니의 낭만적 속삭임은 리틀의 몸으로 육화 하여 우리 앞에 다가온다.

그 아득한 푸른빛을 따라 영화를 보고 있자면

영화 아래에서 샤이론의 사랑도 푸르게 보인다.

샤이론의 피부를 진한 사파이어 빛으로 물들이는 저 깊고 고요한 달빛.

이 영화는 달빛을 닮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생과 소멸의 모순관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